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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교통사고 전문 한문철 변호사도 당한 '법'

주정차 차량 '쿵' 박고 도망가면 '장땡(?)'

[취재파일] 교통사고 전문 한문철 변호사도 당한 '법'
대형마트에서 4만 원 상당의 분유를 훔친 가정주부 A씨가 있습니다. 그리고 길가에 세워진 차량의 뒷문을 들이받아 40만 원 상당의 손해를 입히고 달아난 화물차 운전자 B씨가 있습니다. 만약 이들을 붙잡아 경찰에 넘긴다면 각각 어떤 처벌을 받을까요.

A씨는 절도죄로 최대 6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정상을 참작한다 해도 벌금이나 징역형을 유예하는 정도가 될 겁니다. 어느 쪽이든 ‘빨간 줄’이 그어지는 것입니다.

B씨는 어떨까요. 무죄, 아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요. 황당하시겠지만 지금의 도로교통법이 그렇습니다.

현행 도로교통법 제54조 1항과 148조(벌칙)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낸 사람은 즉시 정차하여 ‘사상자’를 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하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5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말이죠. 보기엔 제법 처벌이 무거워 보입니다. 하지만 바꿔 말해 ‘사상자’가 없다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게 바로 이 법입니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이 많이 생기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아침 출근길, 차에 오르려다 내 차 범퍼나 문이 찌그러져 있는 걸 알아챕니다. 이 정도 손상이면 가해 차량 운전자가 절대 모를 리 없는 사고입니다. 알고도 그냥 내뺐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납니다. 주변의 CCTV와 블랙박스를 간신히 찾아내 지난밤 주차한 이후부터 몇 시간 동안 눈 빠지게 봅니다. 마침내 용의자를 찾아냅니다. '이제 됐다' 싶어 경찰서에 신고를 합니다. 그런데 경찰은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심지어 한문철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에게도 이런 일이 찾아올 정도로 우리 주변에선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한 변호사의 부인이 잠시 차를 세워놨는데, 돌아와서 보니 차량 뒤편의 오른쪽 범퍼 모서리가 까이고 몰딩도 잘렸다는 겁니다. 법을 잘 알기에 경찰서에 신고하는 대신 속으로만 삭였다는 후문입니다.

빵 한 개 훔쳐서 남의 재산에 손실을 가해도 처벌을 받는 시대에 남의 차에 수십에서 수백만 원에 이르는 물질적 손해와 정신적 시간적 피해를 준 사람에게 아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법인 것 같습니다.

물론 남의 차에 흠집을 낸 걸 ‘정말 모르고’ 떠난 사람은 억울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분명히 정상 참작이 돼야 할 겁니다. 그러나 현행법은 ‘나중에 적발되더라도 형사적 처벌이 없으니 잡아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보호해주도록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문철 변호사의 말을 빌리자면 현행 법조항은 “‘그냥 도망가라’고 조장하는 법”입니다.

이러다 보니 가해 차량 운전자가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나오는 경우도 생깁니다. 지난 10일 경기도 안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신중수 씨는 길가에 세워놓은 자신의 차량 오른쪽 뒷문이 움푹 팬 걸 발견했습니다. 그 정도면 가해자가 모를 리 없다 싶었는데 아무런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신 씨는 스스로 탐문에 나섰고 주변 CCTV와 블랙박스를 확보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형사적 처벌은 불가하니 상대 측 보험으로 손해를 만회하는 게 최선”이라는 안내만 받았습니다.

이 때문이었을까요. 가해자가 돌변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몰랐다던 가해자는 신 씨의 차를 피해보려 후진하다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자신도 허리가 삐끗했다며 신 씨 측 보험사에 치료비 청구를 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주변 건물에 설치된 CCTV를 왜 동의도 없이 불법으로 봤느냐”며 으름장을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법이 무뎌진 틈을 타 몰상식이 비집고 들어온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걸 해결한 방법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 도교법 제 54조 1항을 꺼내봅니다. <교통사고를 낸 사람은 즉시 정차하여 ‘사상자’를 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를 <교통사고를 낸 사람은 즉시 정차하여 ‘사상자’ 구호 및 인적, 물적 피해 회복을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로 개정만 하면 될 일입니다. 법이 쓸데없이 많아져 범법자를 양산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의 권리마저 외면해서야 올바른 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법 만드는 국회의원, 법 집행하는 경찰, 검찰, 판사님들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당장 바뀔 걸요?” 인터뷰 말미에 한문철 변호사가 격하게 토해낸 말입니다.   

▶ 주차된 차 들이받고 도망갔는데…처벌 못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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