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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제2의 731부대' 노보리토 연구소의 처벌은?

일본군의 극비 노보리토 연구소를 가다(3/3)

[월드리포트] '제2의 731부대' 노보리토 연구소의 처벌은?
1편 ' ▶ [월드리포트] 옛 일본군이 개발한 '살인 전파'의 정체는?' 2편 ' ▶ [월드리포트] 일본군 세균 살포실험이 부산에서 이뤄진 이유 ' 에 이어 마지막 편입니다. 앞선 1, 2편에선 살인전파 병기, 암살무기, 위조지폐, 스파이기술, 세균전 실험, 풍선폭탄까지 노보리토 연구소가 진행했던 연구 내용들을 소개했습니다.

위 사진은 1943년 4월 도조 히데키 당시 총리(종전 후 A급 전범으로 사형)가 관련 연구자들에게 공훈장을 내렸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제목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과학기술자들이 분발해 떨쳐 일어나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노보리토 연구소의 성과를 살펴보면 오히려 성공한 것보다 실패한 것들이 더 많았습니다. 일반 육해공군 전력에서 연합군에 밀리던 일본군. 군 수뇌부는 전세 역전을 위해 점차 무리한 연구개발을 노보리토 연구소에 맡겼던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발한 첨단 비밀 모략 첩보 기술을 개발해도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습니다.

미군의 도쿄 대공습이 시작된 1945년 3월 일본군 최고지휘부인 '대본영'은 군 지휘부와 일왕, 정부 기관 등을 도쿄에서 170km 정도 떨어진 나가노 현으로 옮기기로 합니다. 본토 결전을 앞두고 좀더 내륙으로 이동한 겁니다.  

나가노 현에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 지하 땅굴(사진 참고)도 만들어집니다. 노보리토 연구소는 마지막까지 군 수뇌부를 따라 움직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조직이었습니다. 나가노 현에서 연구원들은 마지막 과제를 받습니다. 바로 본토 세균전입니다.
노보리토 연구소가 이전한 나가노 현 땅굴
세균전을 준비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곳은 중국에 있던 일본군 731부대였습니다.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유명한 바로 그 부대입니다. 731부대장은 세균전이 시작될 경우 일본군들이 물을 정화해 마실 수 있는 여과장치를 개발합니다. 그리고, 그 여과장치를 가장 먼저 보급한 곳이 나가노 현이었습니다. 이 여과장치들이 1989년 노보리토 연구소의 전 연구원의 집에서 발견됩니다. 아래는 당시 사진입니다. 이 연구원은 앞선 2편에서 독극물 생체실험 사실을 털어놓았던 '반 시게오' 씨입니다.
전 연구원이 보관했던 세균전 대비 오염수 여과장치
오염수 여과장치에 '군사비밀'이라고 적혀 있다
본토 결전은 결국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히로히토 일왕은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종전일인 1945년 8월15일 일본 육군성 군사과는 노보리토 연구소에 극비 전문을 보냅니다. "적에게 입수되면 곤란한 '특수연구'에 관한 모든 증거를 은폐하라." 노보리토 연구소는 관련 서류와 실험 기구 등을 소각 폐기하고, 16일 곧바로 해산식을 열어 연구소의 문을 닫습니다. 아래는 이후 미군들이 연구소를 접수하러 왔을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중국 731부대와 노보리토 연구소의 실상을 조사하기 시작한 겁니다. 압박이 조여오자 일부 연구원들은 미군에 협조를 약속합니다. 반 시게오 씨는 주일 미군기지에서 미군에게 위조지폐 관련 기술을 제공합니다. 독극물 및 세균전 연구원들도 미군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중국 731부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도쿄 전범재판에서 두 곳의 관계자들은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자료관에 설치된 '면책' 부분 설명사진
이후 노보리토 연구소의 진상은 철저히 비밀 속에 감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노보리토 연구소가 있던 나가노 현의 고등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지역 역사 연구차원에서 조사를 시작합니다. 1985년부터는 관련 연구서가 출판되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으로 2011년 전 연구원인 반 시오게 씨(위 사진)가 '육군 노보리토 연구소의 실상'이라는 책을 내면서 수많은 비밀들이 공개됩니다.

뜻 있는 일본 연구자들이 꾸준히 관련 기록과 자료, 증언들을 수집해 드디어 2010년 메이지대학 캠퍼스(가와사키 소재) 내에 자료관을 설립합니다. 연간 방문자는 8000여 명 정도이라고 합니다. 제가 취재를 간 날도 인근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견학을 신청해서 왔더군요. 자료관 관계자가 나와 자세한 설명도 해줍니다.
자료관을 견학 중인 일본 대학생과 시민들
처음 노보리토 연구소를 조사한 사람들은 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자료관 안에는 중고등학생용 해설서도 있었습니다. 노보리토 연구소의 연구 내용과 관계자들은 '철저히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습니다.
중고등학생용 해설 책자
연구소 관계자들에게 비밀유지 명령이 내려졌다는 설명
'일본군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 이렇게까지 했다.' 노보리토 연구소는 분명히 일본인들에게 숨기고 싶은 역사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료관까지 만들어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고 전하는 이유는 뭘까요?

자료관의 야마다 아키라 관장(메이지대 교수)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전쟁의 잔혹성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전쟁 당시 젊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전쟁에 휘말려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알려야 합니다. 과학이 전쟁에 동원됐을 때 연구자들이 어떻게 인간성과 윤리를 잃어버리게 되는지도  알았으면 합니다."

노보리토 연구소의 과거는 분명히 제국주의 일본의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하지만, 현재 운영되고 있는 노보리토 연구소 자료관은 역사를 직시하고, 평화를 도모하려는 용기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인 셈입니다.

일본 정부도 더 이상 위안부 강제동원 등 부끄러운 역사적 진실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인정하고 전후 세대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진정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평화국가로 인정받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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