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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작침] 보수 위기 때마다 소환되는 5·18 왜곡

[마부작침] 보수 위기 때마다 소환되는 5·18 왜곡
5·18 항쟁을 '광주사태', '광주폭동'이라고 규정하거나 이런 주장을 인용한 기사가 증가하기 시작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는 기점이 된 것은 2002년과 2013년이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포털사이트 네이버, 다음, 네이트의 블로그와 카페 게시글, 해당 포털사이트를 통해 검색이 되는 웹문서, 뉴스 등을 분석했다. 5·18 항쟁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기원과 주체, 전개과정을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서다. 5·18에 대한 왜곡의 두 축이 ‘5·18은 폭동이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라는 사실에 근거해 검색 키워드로는 ‘광주+폭동’과 ‘5·18+북한군’으로 설정했다.

네이버 라이브러리 기준, 공공의 영역이라고 할 언론지면에 5·18 항쟁을 폭동이라고 규정한 첫 기사는 1980년 5월 31일이었다. 당시 신군부가 장악하고 있던 계엄사령부가 5·18에 대한 경위와 사후처리방침에 대한 발표문을 실은 것이었다. 이후 1980년에 몇 차례 더 5·18를 폭동으로 규정하는 기사가 등장하지만, 이 또한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인용하거나, 해당 사건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을 인용한 것으로서 결국 5·18을 폭동이라고 규정한 주체는 신군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본 5·18 관련 키워드별 사용량 분석 결과와 같이 이후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기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 정권 교체 극우세력의 역습
그런데 16대 대통령 선거를 4개월 여 앞두고 있던 2002년 8월, 한 보수성향 일간지에 ‘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는 제목의 광고가 게재된다. 해당 광고는 5·18항쟁을 '광주사태'라고 지칭하며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한다.

또, DJ 정권의 사람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켜놓고 계엄령을 선포"해, "(대통령)선거도 없고, 우익들이 잡혀가고, 김정일이 무혈로 서울을 장악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광고를 게재한 곳은 극우 칼럼리스트 지만원이 대표로 있는 시스템사회운동본부였다.

광고라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언론이라는 공적 영역에 다시금 5·18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한 건 생경한 일이다. 북한 배후설은 신군부가 5·18 당시에도 유포한 것이었지만, 북한 특수군이 5·18 항쟁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해당 광고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5.18 왜곡을 연구해 온 오승용 전남대 교수는 2002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한다.

오 교수는 “1997년 대법원이 전직 대통령 전두환에 대해 내란(12.12 쿠데타) 및 내란목적살인(5·18 항쟁)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한 이후 숨죽이고 있던 보수 세력이 반발했었다”며, 일간지에 해당 광고가 게재된 것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던 극우세력이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또 정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 인터넷 보급과 종편 탄생…왜곡의 심화

하지만, '왜 2002년인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전에도 전두환 씨 등 신군부 인사를 중심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주장은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사회적 자정 작용에 의해 걸러졌고,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5·18 항쟁에 대해 소리 높여 ‘폭동’이라거나,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2002년 이후 지만원과 같은 왜곡세력의 주장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은 것일까? 전문가들은 익명성과 무한 복제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의 보급을 이유로 꼽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부터 본격 보급되기 시작한 인터넷은 2002년에 전체 가구의 70.2%에 보급될 정도로 대중화됐다. 이후에도 가구 인터넷 보급률은 꾸준히 증가하는데 2012년에는 82.1%에 달한다. 스마트폰도 대중화되면서 현재는 대부분의 국민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인터넷 대중화는 5·18 왜곡 담론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증가, 그리고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의 심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경향을 특정한 이벤트를 기점으로 더욱 증폭되는 양상을 보였다.
위 그래프는 ‘광주 폭동’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이다. 인터넷 상에 간혹 등장하던 ‘광주 폭동’이라는 용어가 의미있는 수준으로 관찰된 것은 2007년 8월이다. 2007년 7월, 5·18 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된 것이 계기였다.

인터넷 상에선 ‘화려한 휴가’가 5·18을 미화한 것으로 실상은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게시글들이 올라왔는데, 한 언론사는 ‘화려한 휴가’를 본 누리꾼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이른바 전사모 회원 간에 댓글 전쟁이 붙었다며, "(전사모)회원들은 5·18을 공산폭동으로 규정지으며 전 전 대통령을 비호했다"고 댓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2009년 3월과 5월, 2011년 5월, 2013년 5월 시기별 최고점을 기록했다. 2009년 3월은 용산 참사와 이후 전개된 촛불 집회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던 시기이다. 당시의 게시물들은 ‘촛불 집회가 소수 불순세력이 주도했고, 과거 5·18도 불순세력이 주도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이 주를 이룬다. 2009년 촛불 집회를 비판하면서 29년 전인 1980년 5월의 광주를 소환한 것이다. 그리고 2009년 5월 이명박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행사에서 5·18 항쟁 상징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불허하면서, 5·18항쟁 단체들이 행사 참석을 거부했던 시기이다.

20011년 5월은 5·18 항쟁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과 관련해 극우단체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한 시기다.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등을 찾아가 “광주시민 학살은 북한 특수부대 소행”이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한 이들 단체들은 “5·18는 북한군이 개입된 폭동이었다”며  “잘못 알려진 진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 폭동’이라는 키워드로 가장 많은 게시물이나 뉴스가 검색된 시기는 2013년 5월이다. 2011년 12월 개국한 종편 <채널A>와 <TV조선>은 201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즈음하여 탈북자 인터뷰를 마련했다. <채널A>는 5·18당시 북한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다고 주장하는 탈북자 인터뷰를 검증 없이 방송했다. 뒷모습으로 목소리만 나온 한 탈북자는 “광주 폭동 때 참가했던 사람들 가운데 조장, 부조장들은 (북으로 돌아가) 군단 사령관도 되고 그랬다”며, “전라도 사람들은 광주 폭동이 그렇게 들통 나면 유공자 대우 못 받는다”고 말했다.

<TV조선>은 북한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임천용이라는 인물을 출연시켜, “(5·18 당시) 600명 규모의 북한군 1개 대대가 침투했다”며, “전남도청을 점령한 것은 시민군이 아니고 북한에서 내려온 게릴라였다”는 주장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 해당 방송으로 두 종편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법적·사회적으로 공고화된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의미와 희생자와 참가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할 우려가 크다”며 중징계를 받았고 해당 종편은 사과 방송까지 했다. 하지만, 왜곡 발언이 담긴 방송 내용은 사진 또는 게시물 형태로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퍼진 뒤였다.

● 지속적 왜곡…의혹을 넘어 '담론·논란'이 된 왜곡
위 그래프는 ‘5.18+북한군’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이다. 5·18 항쟁은 폭동이었다는 주장은 신군부에서부터 제기되었지만, ‘북한특수군 개입설’의 출발점은 추적 결과, 앞서 소개한 2002년 신문 광고였다. 물론 그 이전에 준비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외부로 공개돼 인터넷으로 추적 가능한 출발 시기는 2002년이다. 다만, 당시에는 큰 반향이 없었다. 그랬던 것이 2009년 10월에는 인터넷 상에 의미 있는 수준으로 관찰됐다.

계기는 탈북자들의 주장, 특히 북한특수군 출신 탈북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언’이었다. 2009년 6월, ‘자유북한군인연합’이라는 단체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5·18에 북한 특수군이 투입되었다는 내용의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이 발간했는데, 이 책이 5·18에 북한군 투입된 증거라는 글이 블로그와 게시판 등에 광범위하게 게재됐다. 저자인 자유북한군인연합의 대표는 앞서 종편에 출연해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한 임천용이다.

하지만,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증언자로 등장한 탈북자 중에 실제로 1980년 5월, 북한 특수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사람은 없다. 김희송 전남대 교수의 "5·18 역사 왜곡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탈북자들의 증언은 친구나 직장 동료 등에게 들었던 소문이거나 심지어 ‘군당비서에게 들었다는 아버지의 전언’ 등 전언의 전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북한이라는 특수성, 일반인이 경험할 수 없는 북한을 실제로 경험한 탈북자의 이야기라는 접근의 제한성을 바탕으로 이들의 ‘전언’은 사실로 포장돼 필요에 따라 소비됐다.

왜곡 과정을 분석해보면, 탈북자의 전언에 바탕한 ‘북한 특수군 개입설’이 대표적으로 소비된 시기가 2011년 5월이었다. 이 시기는 앞서 언급했듯 극우단체들이 탈북자들의 전언을 근거로 5·18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다며 5·18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 반대운동을 펼쳤던 때다. 그리고 2013년 5월, 종편이 ‘북한 특수군 개입설’을 여과 없이 방송하며 대량 유통됐다.

이런 결과를 종합하면, "5·18은 폭동"이라거나 "5·18에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식의 주장은 보수 정권이 촛불 집회 등과 같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리고 5·18 항쟁의 제도화가 진전되는 이벤트가 있을 때, 그리고 종편 출범 이후에 증가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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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한창진·안혜민(인턴)
디자인/개발: 임송이

※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 속에서 송곳 같은 팩트를 찾는 저널리즘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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