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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74년 수장된 유골 앞에 "왜 한 게 없느냐?"는 한국 정부

[취재파일] 74년 수장된 유골 앞에 "왜 한 게 없느냐?"는 한국 정부
며칠 전입니다. 퇴근해서 막 저녁 식탁에 앉았는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처음 보는 번호였습니다. 받아 보니 지난 주말 히로시마에서 열린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위령식 취재 때 만난 현지의 한국 영사관 관계자였습니다.

기사를 보고 “섭섭해서”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8뉴스 방송에 앞서 뉴스 홈페이지에 먼저 송고한 취재파일 기사( ▶ [취재파일] 차가운 바닷속에서 74년…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천도재') 얘기였습니다. “섭섭하다”는 단어는 기사 내용에 불만을 가진 정부 관계자나 홍보 담당자들이 ‘항의’할 때 제일 먼저 꺼내는 표현입니다.

기사 내용에 “한국 정부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문장 얘기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첫 마디가 뜻밖이었습니다. “기사에 ‘감독하고 관리하던’ 이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그게 왜 관리감독입니까? 이건 명백한 ‘팩트 왜곡’이죠.” “네? 관리, 감독이요?” 뜻 밖에도 영사관 측이 가장 먼저 ‘문제 삼은’ 건 아래 내용입니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10시 사이. 위태롭던 갱도가 결국 무너졌습니다. 무리한 채탄작업 때문에 바닷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탓입니다. 작업 중이던 노동자 183명이 순식간에 무너진 갱도 아래 깔려 숨졌습니다. 조선인 징용자 136명이 희생됐습니다. 이들을 감독하고 관리하던 일본인도 47명 함께 사망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지 만 74년이 지났지만, 희생자 183명은 지금도 여전히 무너진 갱도 아래 수장돼 있습니다.

‘감독하고 관리하던 일본인’이라는 기사 속 표현은 주최측이 취재진에게 배포한 설명 자료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표현이 ‘팩트 오류’라는 영사관 측의 주장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기사의 핵심은 74년 동안 수장돼 있는 조선인 징용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사를 읽고 한국 영사관 관계자가 국제전화까지 걸어서 항의하는 첫 번째 이유가 일본인 희생자들의 직책이나 역할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안됐습니다.

꽤 오래 동안 통화했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일본 시민단체가 이 사건을 알린 건 ‘힘 없는 일본인 노동자’ 47명이 희생됐기 때문이라는 게 영사관 측 주장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관리하고 감독하던 일본인’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들이 마치 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은 오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일본 시민단체가 오로지 불쌍한 조선인 징용자를 돕기 위해 나선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니 “팩트 왜곡”이라는 겁니다.

위령제가 열린 날, 한국 영사관 관계자들도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히로시마 총영사가 직접 추모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있으면서도 모두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공동대표 이노우에 요코 씨의 인사말은 못 들었나 봅니다. “일본이 저질러 온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역사를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유골 수습은 불가피한 일”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기사가 잘못된 팩트로 일본 시민단체의 의도를 미화하고 있다’는 한국 영사관 측의 억지가 더 답답한 건 그 궤변 뒤에 엿보이는 속마음 때문입니다. ‘공을 죄다 일본 시민들이 가져가면 한국 정부는 뭐가 돼?’ 하는 마음 말입니다. 많은 한국 국민들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양심 있는 일본 시민들이 그들에겐 함께 힘을 합쳐서 일본 정부를 압박할 조력자가 아니라 경쟁상대로 보이는 듯 했습니다. 

영사관 측은 이어 “한국 정부가 지켜만 보고 있다는 표현도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역시 명백한 “팩트 왜곡”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조세이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를 위해서 한국 정부는 그 동안 많은 일을 해 왔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영사관 측이 내세우는 첫 번째 치적은 경제적 지원입니다. 일본 시민단체 측은 93년부터 한국에 있는 유족들까지 초청해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위령제 비용은 물론 유족들 여비까지 일본 시민단체가 부담해 왔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영사관 측도 그 비용을 ‘일부 지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영사관 측은 특히,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위령제를 한국 불교계에 알린 게 바로 자신들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위령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유족과 일본 시민단체만 참여해 왔습니다. 그런데 올해 처음 한국 불교계가 동참했습니다. 분명 상당히 의미 있는 진전입니다.

영사관 측은 이런 진전이 모두 자신들의 공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결과만 놓고 보면 ‘팩트’처럼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말하자면,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니라고 할까요?

한국 불교계가 처음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위령제를 알게 된 건 지난해 열린 한중일불교대회 때입니다. 한중일불교대회는 한중일 세 나라 불교계의 연합행사입니다. 3국이 돌아가며 행사를 맡고 주최국에서 대회가 열립니다.

지난해는 일본 차례였는데 히로시마에서 행사를 했습니다. ‘광복 70년’ 일본식으로는 ‘전후 70년’을 기념하기 위해섭니다. 이 때문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해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열렸고 히로시마 총영사도 위령제에 참석했습니다.

조세이 탄광이 있던 우베 시 역시 히로시마 영사관의 관할 지역입니다. 이 때문에 영사관 측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위령제에서 만난 한국 불교계 인사들에게 조세이 탄광 희생자 위령제에도 참석해 주면 어떻겠냐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불교계가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이번 행사가 성사됐습니다.

하지만, 이를 ‘조세이 탄광 희생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의 결과’라고 내세우는 건 보기에 적잖이 옹색합니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서 벌인 사업도 아니고, 어렵다는 불교계를 애써 설득한 것도 아닙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런 행사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불교계가 나선 것인데, 그 말을 전한 이가 영사관 관계자였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사고 발생 74년이 지났는데도 조선인 징용 피해자 136명이 여전히 수장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사관 측의 주장대로 "한국 정부는 지켜만 보고 있다"는 기사 내용이 "팩트 오류"라면, 이야 말로 큰일입니다. 정부가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이렇다면 한 많은 희생자들의 유골을 찾을 가능성이 앞으로도 높지 않다는 뜻이 될테니 말입니다. 

기사 내용이 맞아도 큰일이긴 합니다. 국민들이 보기엔 "지켜만 보고" 있는데, 정부는 자신들은 이미 할 만큼 했다고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눈높이가 국민과 이렇게나 다르니 말입니다.

오랜 통화 끝에, “한국 정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위령제 경비를 누가 대고 위령제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관한 문장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장 시급한 조세이 탄광 유골 수습에 관한 문장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나아가 조선인 징용자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역할 전반에 대한 원론적인 문장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며칠이 지났지만, 한국 정부 외교 담당자들이 그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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