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정의의 여신'이 한국에서 칼을 버린 이유…로스쿨의 존재가치

'개천의 용' 사법시험 존치의 허구성…염치없는 대한변협과 기성 법조인

[취재파일] '정의의 여신'이 한국에서 칼을 버린 이유…로스쿨의 존재가치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왜 칼 대신 ‘법전’을 손에 쥔 채 ‘앉아’ 있을까. 

지난 2008년 겨울, 한 판사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가 한국에서 칼을 버린 이유를 내게 물었다.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을 자주 봤지만 한복을 차려 입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동상의 오른손과 왼손, 자세까지 유심히 살펴보진 않았었다.

판사의 말은 이랬다. 세계적으로 정의의 여신은 오른손엔 칼, 왼손엔 천칭저울을 들고 서 있다. 반면 우리 대법원의 ‘정의의 여신상’은 오른손엔 천칭저울, 왼손엔 법전, 그리고 앉아있다. 그는 한국화 된 정의의 여신상을 불편해했다. 

그의 해석은 남달랐다. 칼은 ‘정의 실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불변의 가치를 뜻하지만, 법전은 가변적인 것이라 정의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유신시절 독재자가 만든 악법이 법전에 적혀 있다는 이유로 정의가 될 수 없다는 맥락이다.

또 앉아있는 건 사회는 외면한 채 법전만 쳐다보는 법조인처럼 비친다는 것이었다. 사법시험 합격을 위해 법전만 외우고, 성공하면 천칭저울을 들고 고귀한 척 편안히 앉아있을 수 있는 법조계의 현실을 풍자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유별난 해석(?)이었다. 이 판사는 이듬해 겨울, 돈을 벌기 위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비록 법원 내 주류 대학 출신도 아니었지만, 사법연수원 시절 좋은 성적을 얻어 수도권 초임 판사가 됐고, 서울 강남에 터까지 잡았지만 한계에 봉착했다고 말했다. 이웃 수준에 맞춰 자녀 교육을 시키려니 법관 월급으론 감당할 수 없어 법복을 벗었다.
 
그동안 변호사가 된 전직 판사의 이런 해석을 예술품에 대한 개인의 감상평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최근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는 대한변호사협회 등 기성 법조인을 보고 있자면 한 귀로 듣고 흘릴 게 아니었다. 

● ‘사법시험이 희망의 사다리(?)’…부끄럼 모르는 대한변협

법학전문대학원, 이른바 로스쿨이 도입되기까지 지난한 시간이 걸렸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법률서비스 향상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됐지만, 공고한 법조 카르텔의 반대를 뚫지 못했다. 하나회를 척결한 김영삼 대통령도 법조계의 철벽은 이겨내지 못했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로스쿨 설치법이 제정됐고, 그렇게 사법개혁의 한 축인 로스쿨은 도입됐다. 장시간의 토론과 협의, 사회 각층의 참여를 통해 내린 합의이자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서초동 법조를 출입할 때도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기성 법조인 상당수는 만날 때마다 ‘로스쿨 법’을 폐지해야 된다는 설파했다. 언론 본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로스쿨 법 폐지 여론을 조성하라고 했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지만, 몇 년이 지나서 속사정이 보였다. 이면엔 법조인의 욕심이 숨어있었고,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법조계의 고질병도 엿보였다.

대한변협 등 기성 법조인의 사시 존치 근거는 눈길이 간다. ‘희망의 사다리, 개천의 용’, 이런 단선화 된 구호로 사시 존치를 주장하고 있고, 일부 시민들도 이런 선명성에 동의할지 모른다. 그러나 본질을 따져봐야 한다.

법은 실핏줄이다.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행동도 법에 따라 정의된다. 사실상 ‘사회=법’이라고 할 만큼 실생활과 밀접하다는 뜻이다. 이렇듯 법은 보편적이고 다수에게 공유되고, 서로를 연결시키는 광범위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법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될 수 없고, 권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정작 기성 법조인들은 법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보편적 권리’를 ‘소수의 권력’으로 만들었고, 이를 독점적 배타적으로 사용했다. 그동안 변호사협회가 사시 합격자 숫자를 줄이려고 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들은 법이 신성하기 때문에 법을 다루는 사람 역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말로 합리화했다. 그러나 정작 법을 다루는 사람의 인품과 사회에 대한 성찰, 공감능력은 경시하며 법전을 누가 더 잘 외우는지를 척도로 삼았고, 어느새 이런 법조 문화를 당연하다 듯 여기게 만들었다. 

그런 탓에 법조인이 되는 걸 ‘용(龍)’이라고 말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 사시에 합격하면 ‘개천의 용’이 되고, 사시를 ‘희망의 사다리’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사시만 합격하면 법전을 한 손에 든 채 앉아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될 수 있다며 ‘너희들도 이런 사다리에 오를 수 있으니 우리를 지지해 달라’고 말하는 게 대한변협 등 사시 존치론자의 얼굴이다.

사법시험이 ‘사명감 있는 법조인’, ‘공익을 실현하는 법조인’을 양성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그런 말은 찾아볼 수 없다.  ‘법조인은 권력’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고, 고착화된 사회구조에서 그나마 사법시험이 계층 이동의 숨구멍이라는 점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 ‘로스쿨은 돈스쿨’?…출발부터 잘못된 사시 존치

대한변협 등 법조인들이 사시 존치를 주장하는 근거는 '돈', 즉 비용이다. 사시는 돈 없이도 되지만, 로스쿨은 ‘돈스쿨’이라며 가난한 이들의 법조인 진출을 막는다고 말하고 있다. 또 로스쿨은 본질적으로 고비용 구조인 탓에 ‘부의 세습이 교육의 세습’이 된다고 공략하고 있다.

하지만 로스쿨이 비용이 드는 건 당연하다. 의도적으로 그런 구조로 만들었다. 대한변협의 주장은 본질부터 잘못됐고 접근법도 틀렸다. 변호사가 되는데 '돈이 들면 안 된다'는 전제부터 잘못됐다는 것이다.

로스쿨 학비는 비싸다.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이하 협의회)가 밝힌 2013년 로스쿨 평균 등록금은 1천5백32만 원으로, 가장 비싼 로스쿨은 2천80만 원 수준이다. 여기에 교재비, 주거비 등 기타 생활비를 포함하면 금액은 더 늘어난다. 개인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리 느껴질 수 있겠지만, 3년간 매년 수 천만 원씩 낸다는 건 부담스럽다.

하지만, 의무 교육이 아닌 이상 모든 교육엔 비용이 든다. 로스쿨뿐만 아니라 의학전문대학원 등록금(평균 1천5백50만 원), 경영전문대학원 등록금(평균 1천9백90만 원)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법시험은 돈이 들지 않을까. 협의회는 사법시험 비용을 8천만 원 이상이라고 밝혔다. 수험기간, 즉 사시 합격 평균기간을 4.79년으로 산정하고, 매달 140만 원(식비 30만 원, 학원비 30만 원, 교재비 10만 원, 주거비 50만 원 등) 이상이 든다는 것이다. 사시 합격률이 전체 응시자 중 2.9%라고 했을 때 불합격자들은 비용은 합격할 때까지 더 늘어난다.

결국 사시에 투입되는 비용이 로스쿨 비용보다 더 든다는 것이다. 이는 협의회가 유리하게 뽑은 수치일 수 있지만, 사시를 준비한 이들에게 물어보면 만만치 않는 비용이 든다는 걸 알 수 있다.
 
장남을 사시에 합격하기 위해 동생은 대학을 포기하고, 집안 전체가 장남 뒷바라지를 하는 건 드라마 속 클리셰다. 현실에서도 부유한 사법시험 준비생은 사시를 합격한 사법연수원생들로부터 별도의 과외를 받는다고 몇 백만 원의 돈을 더 쓴다. 이를 지켜보는 다수의 사시 준비생은 “이런 금수저들”이라며 이를 악물고 학원 강의를 듣는다.

잠을 덜 자며 더 노력했지만, 합격의 기쁨은 공평하지 않다. 사시 역시 비용은 들고, 부유한 이들에게 편향된 기회를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낮에 일하고 밤엔 중고 서점에서 산 교재로 독학하며 사시에 합격하는 학생도 있다. 하지만, 이런 극소수의 성공한 주경야독 수험생을 위해 사시를 존치해야 한다는 건 비약이고, 이런 이들을 위해서라도 로스쿨이 필요하다.  

사법시험엔 장학금 자체가 없다. 로스쿨의 장학금 비율을 높여 주경야독하는 '극소수'와 학원 강의를 듣는 '보편적 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맞다. 게다가 지난 해 전국 로스쿨 전체 등록금(953억 원) 중 장학금 지급액은 358억 원이었다. 재학생 6,000명 중 15.8%에게 전액 장학금도 지급됐다. 또 지난 2002년부터 12년간 독학사, 학점은행, 방통대, 사이버대 출신으로 사법시험이라는 ‘희망의 사다리(동의할 수 없는 표현이지만)’로 ‘개천의 용(동의할 수 없는 표현이지만)’이 된 이들은 20명인 반면, 절반의 시간으로 지난 5년간 같은 출신으로 로스쿨에 합격한 이들은 57명이었다. 
● 근거없는 사시 존치…특별한 존재일 수 없는 ‘변호사’

대한변협 등 기성 법조인들이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면서 언급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사법연수원이다. 그들이 사시 존치의 근거로 삼는 ‘개천의 용’도 사법연수원은 무조건 수료해야 한다. 사시만 합격하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무료 2년제 로스쿨’인 사법연수원을 다니며 5급 공무원 대우를 받았다.

연수원 1년차 때 5급 공무원 1호봉, 2년차 때는 2호봉 월급을 받고 무료로 수업을 들어왔다. 연수원생 1천명 기준으로 매년 세금 500억 원 이상의 사법연수원 비용으로 쓰였다. 하지만, 그동안 법조계는 이들이 왜 무료로 연수원을 다녀야 되는지, 이런 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해야 되는지 답하지 못했다. 필요성도 증명하지 못했다. 이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돈이 들면 안 된다는 그들의 전제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로스쿨=돈스쿨’이라고 공격하는 그들의 발상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사시 합격자 1천명을 기준으로, 20% 남짓만 판검사로 임용되고, 대다수는 변호사가 됐다. 연수원 수료 뒤 곧장 대형 로펌에 들어가고, 대기업에 취업하고, 사무실을 차리는 등 경제적 이익(수익)을 얻는 변호사들을 위해 국민세금이 쓰일 필요는 없었다.

쉽게 생각해서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교육비를 전액 세금으로 충당하자고 한다면 납득하겠는가. 변호사는 법을 다루기에 공적 역할을 일정 부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을 다루게 될 예비 의사들도 교육비는 각자 부담한다. 결론적으로 사법시험 합격자들 역시 ‘수익자부담 원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공짜’ 사법연수원을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컸고, 심지어 개업 변호사들에게 연수원 비용을 환수하자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변호사를 양성하는 로스쿨은 여느 대학원과 마찬가지로 각자 비용 부담을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잘 아는 탓일까. 대한변협도 사시 존치를 주장하면서도 사법연수원을 ‘무료’로 유지하자는 얘기는 피하고 있다. 사법시험은 유지되면서 사법연수원은 유로화 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말한 ‘개천의 용’은 날 수 없고, ‘희망의 사다리’로 칭송한 ‘사법고시’는 ‘돈고시’의 또 다른 이름이 될 뿐이다. 

이렇게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건 애당초 사시존치를 주장하는 법조인들의 접근법이 잘못된 탓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예비 변호사를 지원할 것이고, 해야 한다. 다만 그 대상은 법학도 전체가 아니다. 그들 중 섞여 있는 사회적 소수자, 경제적 환경적으로 어려운 이들에 대한 선택적 지원이다. 그리고 이런 지원은 그들이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들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고,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길 바라는 공동체의 관심이자 배려 때문이다. ‘예비 법조인’이라는 게 특별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 사법고시의 병폐와 로스쿨의 음서제…대한변협의 어설픈 연기 

대한변협 등 법조인은 사법시험 자체의 필요성과 정당성보단 로스쿨의 폐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시 존치를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제'가 됐다는 것이다. 부자나 권력자 등 기득권자들의 대물림의 공간으로 로스쿨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건 사실이다.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가 로스쿨을 다니는 자녀의 취업을 부탁했다. 또 대형 로펌은 로스쿨생의 부친과 조부가 누군지를 선발기준으로 삼았다. 심지어 고위직 출신 법조인을 데려 오려는 대형 로펌이 영입 조건으로 로스쿨 자녀와의 동반 입사를 제안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이처럼 기득권에겐 편향된 기회가 제공됐다. 불공정한 현실에 공분하는 건 마땅하지만, 이는 로스쿨 탓이 아니다. 이런 불공정을 당연시 여기고, 권력화한 자들의 잘못이다. 이는 로스쿨 제도와 임용방식을 더 투명화하고 엄격화해서 해결할 일이다. 

사법시험만 존재하던 시절을 되돌아보자.

"사법연수원 성적이 나보다 낮은 연수원 동기가 대형 로펌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전직 대법관이더라. 외조부가 전직 재판관이더라." "내가 떨어진 금융기관 변호사에 동기가 취직했는데, 부친이 대기업 사장이더라."

사시만 있던 시절에도 존재한 현실이었다. 심지어 그나마 성적순으로 임용된 판사와 검사라도, 임관 후 인사를 두고 뒷말은 끊임없이 나온다.

"나보다 성적은 낮고, 성과도 없는 연수원 동기가 법원 행정처, 법무부, 대검을 가더라. 알고 보니 검찰국장의 고등학교 후배더라." "그 친구 고향 선배가 유력 정치인인데 법무부에 전화를 했다더라. 청와대 핵심 인사가 꽂았더라."
 
이 외에도 전관예우, 변호사가 주인공인 각종 ‘법조게이트’...너무 익숙한 얘기로, 질릴 정도로 기시감이 든다. 이런 불공정과 불법은 사법시험만 있을 때도 존재했고, 도리어 고질적 병폐였다.

마치 이런 불공정이 로스쿨 때 처음 생긴 것처럼 놀란 척하는 대한변협의 연기는 어설프다. 그 동안 ‘사법시험’이라는 제도 내에서 발생한 불공정에 침묵한 건 대한변협 등 기성 법조인이었다. 사법시험만 합격하면 그래도 먹고 살만하고 ‘변호사’라는 직업 그 자체로 사회의 주류로 인정해주니, 내부의 부정과 불법엔 눈감았다.

고작 4년째 변호사를 배출한 로스쿨을 두고 '음서제'라고 비판했던 대한변협은 지난 57년간 치러진 사법시험 제도를 두고 무슨 말을 할 텐가. 대한변협이 로스쿨에게 적용한 기준대로라면 사시는 50년 전에 폐지됐어야 한다. 

●  불완전한 로스쿨의 존재 이유 

사법시험이든, 로스쿨이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만든 제도이고, 제도 속에 사람이 있으니 오류는 생기는 건 당연하다. 다만, 우리사회에 더 필요한 제도가 무엇인지를 되짚어 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로스쿨을 도입한 이유이고, 로스쿨의 존재가치다.

로스쿨은 사법시험의 폐단과 ‘새로운 법조인’을 요구하는 사회의 필요성 때문에 도입됐다. 시민이 원하는 법률 서비스의 수준은 높았지만 기성 법조인들은 충족하지 못했다. 더 이상 천편일률적인 법조인은 시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다양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세분화 전문화된 법을 다루는 변호사들이 필요했다.

이는 소비자 측면만 고려된 것이 아니고, 서비스 제공자인 법조인의 입장도 고려된 것이다. 법전을 잘 외우는 법조인이 더 이상 훌륭한 변호사로 평가 받을 수 없게 됐고, 기성 법조인 스스로도 사법시험 지식으로 법률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법시험의 시스템으론 ‘다수가 접근 가능한 다양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입증이 됐다. 때문에 로스쿨을 도입하면서 소수 선발에 역점을 뒀던 사시 방식이 아닌 '양성'에 방점을 뒀다. 학부시절 학과 공부는 소홀히 하고 오로지 법전만 외워 사시에 합격한 법조인이 아닌  다른 형태의 법조인을 양성하자는 취지였다. 다양한 전공을 가진 이들이 관심분야를 공부한 뒤, 이들 중 일부를 법조인으로 ‘양성’하자는 합의에서 로스쿨은 도입된 것이다.

물론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지난 55회 사법시험 합격자 중 법학과 출신 비율은 81%, 비법학과 출신이 19%인 반면, 제3회 변호사시험(로스쿨 출신) 합격자 중 법학과 출신은 53%, 비법학과 출신이 43%라는 점을 볼 때 다양한 법조인이 배출될 가능성은 보여주고 있다.

사법시험 출신 법조인이 사회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사시 출신 판검사 중에서도 진정성 있는 이들도 많다. 헌법을 수호하고 정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다.'변호사법 1조(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가 사문화된 현실에서도 인권 옹호를 위해 매진하는 변호사들도 물론 있다.

변호사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보다, (방향성에 반대하는 쪽도 있겠지만) 공동체 발전과 소수자 보호를 위해 정진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나 공익인권법 재단 ‘공감’ 같은 변호사단체도 존재한다. 이들의 공을 인정해주는 게 마땅하다. 다만 이들과 같은 변호사를 더 배출하기 위해서라도 로스쿨이 필요하다는 게 우리 사회의 판단이었다.

사법시험이 야기한 사회적 불이익은 너무나 컸다. 성적이 법률가 평가의 절대 기준이 되면서 사시를 합격한 다수들은 '법률가'가 아닌 '특권층'이 됐다. 사법시험 합격을 특권층 진입의 열쇠로 여기면서, 자연스럽게 법을 특권층의 보호구로 사용했다. 자신이 왜 법률가가 됐는지, 무엇을 하기 위해 변호사가 됐는지를 알지 못했다.

사회와 장시간 단절한 채 법전만 외우고, 가혹하리만큼 힘든 사법시험 합격이 절대 목표가 되면서, 사시만 합격하면 ‘정의의 여신상’처럼 법전을 들고 앉아있어도 되는 걸로 착각하게 됐다. 변호사는 법률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만, 서비스 제공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압적이고 권위적이었다. 변호사들이 법을 배타적 독점적으로 사용하면서 공정가격은 기대할 수 없었고 독점가격만 존재했다. 서민들에겐 10만원 가치의 상담이 필요한 사건이 다수 존재하지만, 이런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했다. 벌금형이 나올 게 예상되는 사건이지만, 법률에 무지한 의뢰인을 상대로 '벌금형'을 성공보수로 책정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됐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법조계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높아졌다.

● 변호사 권력의 종말…로스쿨 제도 공고히 해야  

기성 변호사들 중 일부는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말이냐며 억울해 할지 모른다. 물론 변호사 업계도 과거보다 경쟁이 치열해졌다. 파산하는 변호사도 생기고, 통상 대기업 ‘부장’급으로 입사하던 변호가가 ‘대리’로 입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호사 업계를 제외한 다른 직업군에선 이미 수 십 년 전부터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 경쟁을 자기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언제까지 변호사 업계가 자연의 법칙, 경쟁사회에서 열외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동안 변호사 자격증을 권력이라고 착각한 스스로를 탓하고 반성 해야지, 억울해 해서는 안 된다. 왜곡된 진입장벽과 카르텔을 깨뜨리고 공정한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충격을 준 로스쿨을 과녁으로 삼아선 더더욱 안 된다.

사법시험을 로스쿨과 함께 존치시키자는 대한변협 등 법조인들도 솔직해져야 한다. 이들 역시 로스쿨에서도 장학금을 받으며 별다른 비용 없이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를 두곤 ‘희망의 사다리’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로스쿨은 3년이 걸려서? 아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는 '권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스쿨은 변호사가 된 것만으로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스쿨 제도는 이를 지양하는 방식으로 도입됐고, 이런 점 때문에 사시와 로스쿨은 공존할 수 없다. 

대한변협은 올 초 퇴임한 차한성 대법관의 개업 신고를 반려한 바 있다. 그리고 공개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대법관 퇴임자는 변호사로 개업해 사익을 취할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봉사하고 사회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전관예우의 씁쓸함도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대한변협이 변호사는 '사익을 쫓는 존재'라고 인정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변호사로서 소외계층을 변호하며 사회에 헌신할 수 있지만, 대한변협 스스로도 이런 행위를 변호사에겐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스스로를 감금해 맹목적으로 공부해 사시를 합격한 변호사 입장에서 사회 헌신은 손해로 보이기 때문일까. 

다양한 사고와 경험을 가진 이들이 로스쿨을 택해서 변호사가 된다면,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할 것이다. 사법시험의 ‘선발’이 아닌 로스쿨의 ‘양성’을 통해 그 모습이 인권 변호사일 수도 있고, 해외무역, 복지, IT, 동아시아 정세에 해박한 변호사일 수도 있다. 다만 기성 법조인이 보여준 법조 권력자의 모습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아직 로스쿨의 결과물이 사회에 어떻게 뿌리내릴지 장담할 수 없기에 이상적 기대는 경계해야 하지만, 사법시험보다는 현실적 기대를 가능하게 한다. 대한변협 등 기성 법조인들이 사시 존치 주장을 철회하고 로스쿨 제도 보완에 힘을 써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시대가 변하면 제도도 변한다. 2007년 로스쿨 도입도 이런 변화의 흐름이었다. 당시 ‘로스쿨과 사시는 공존할 수 없다’는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사법시험을 10년간 유예했다. 갑작스런 폐지로 사시준비생들에게 발생할 불이익을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배려였고, 그 배려의 시간도 충분했다.

로스쿨이 도입되면서 검찰-법관 임용방식도 바뀌었다. 법조일원화 차원이었고, 이젠 사시 합격자든, 로스쿨 졸업자든 바로 법관이 될 수 없다. 이를 두고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 역시 사회의 요구였기에 변화를 한 것이다. 변화는 그런 것이다. 법이 신성하다고 변호사까지 거룩하게 여기는 시절은 끝났다. 사법시험 합격이 권력이 되는 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대한변협도, 기성법조인도 '한 손에 법전, 한 손엔 천칭저울'을 희망의 사다리로 여기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이다.    

(사진 출처=연합)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