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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필리핀 '총격' 쇼크…왜 한인들을 죽음에

● 10월 2일 새벽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10월 2일 새벽 1시,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의 서남쪽 외곽도시 카비테의 한 저택에 살고 있는 여성이 경찰서에 구조 요청 전화를 했습니다. 경찰은 그냥 흘려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7시 40분쯤, 중국 국적의 한인 여성과 남편인 건축업자 이 모씨는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부인은 집 안에서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은 채, 남편 이씨는 가슴과 허벅지 등 몸통 이곳 저곳에 총을 맞은채 대문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당시 필리핀 주재 한국 대사관 측은 금품을 노린 '단순 강도'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취재팀은 현장을 직접 가보기로 했습니다. 마닐라에서 차를 타고 한시간 반쯤, 따가이따이라고 골프장이 많아 한국인이 자주 찾는다는 지역과 가까운 도로 변에 사건이 벌어진 저택이 있었습니다. 워낙 크게 잘 지어진 집이라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문 앞에 서자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습니다. 높은 담장 위로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둘러쳐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온 필리핀 현지인은 집에 아무도 없다며 자신은 지난 5일부터 일을 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마을 한인들을 수소문했습니다. 대부분 이번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건 일주일 전에 개들이 다 토하고 난리가 났대요. 보니까 닭 머리에 약을 넣어서 쑥 던져놨더래. 그리고 나서 이삼일 있다가 (담장 위)전기선이 끊어져 있더래. 경찰에 이야기를 한 거에요. 점검 좀 해라. 경찰이 보고 나서 순찰 자주 하겠습니다… 그랬대요. 그 뒤 사건이 난 거죠."

당초 대사관 발표와 달리 누군가가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살인'을 저지른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왜? 

● 일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필리핀 현지인과 마찰

현지 교민들은 희생자와 교민들과의 관계는 원만했으며 좋은 일도 많이 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지나다 만나면 좋은 말도 많이 해줬다고 했습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고 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은 건축업자였어요. 건축일, 노가다 일을 하다보면 옛날에 그런 말이 있어요. 노가다 십장이라는 말. 애들을 험악하게 가르치는 거죠. 그런데 필리핀 애들 아주 무섭습니다. 자존심이 장난이 아니에요.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 안합니다."

"필리핀 노동자들 일 시킬 때 좀 세게 다루긴 했어요. 너 잘못했으니까… 너 농땡이 쳤으니까 …이럴려면 그만 둬… 한국 사람 목소리 톤이 높죠. 그런데 얘네들은 용납못해 목소리 큰거."

일부에선 숨진 이 씨가 '총'을 차고 건축현장을 다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했습니다.

현장을 취재한 결과, 일하는 방식과 문화를 둘러싸고 필리핀 현지인과 갈등이 벌어졌고 이게 사건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지 경찰과 한국 대사관도 사건 이후에야 희생자가 종종 현지 노동자들과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밝혔습니다. 범인은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필리핀 은퇴이민
● 필리핀 한인 피살…해결은 요원 

이 곳에서 30분 정도 더 외곽으로 나가면 '실링'이란 마을이 나옵니다. 지난 8월, 역시 총격에 숨진 60대 나 모씨 부부가 살던 곳입니다. 나씨 집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60년대나 볼만했을 시골길을 수 킬로미터 달린 뒤 양 옆이 밀림인 비포장도로를 2킬로미터 정도 지나니 오른쪽 끝자락에 높이 6~7미터 정도의 담으로 둘러싼 저택이 나왔습니다.

워낙 높은 담에, 역시 전기 철조망, 꾹 닫힌 대문.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요새로 보였습니다. 한시간 가까이 머물렀는데 현지 필리핀 사람 2명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택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현지 교민들은 나씨 부부가 마닐라에 살다가 이 외진 곳으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동업자와 공장을 짓기로 했는데, 사업이 틀어져서인지 상당한 갈등을 겪은 것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대사관 취재 결과, 필리핀 경찰로부터 2~3주 전 나씨 부부 살인 용의자를 잡았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총을 쏜 당사자인지, 범행 단순 가담자인지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현지 대사관 영사의 말입니다.

"(검거된 사람이) 현지인이에요. 현지인인데… 아직 수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정범(주범)을 잡아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야 사주한 사람이 나오는 거고, 사주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우리 한국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이어 필리핀 경찰의 능력을 믿기는 솔직히 어렵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 나라는 공식적으로 수사활동비를 지급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한국인 피살사건이 발생할 경우엔 본인들, 그러니까 희생자 가족들이 신경 써달라고 돈을 줘야 합니다. 그 돈으로 수사 활동비를 해서 경찰을 움직이게 하는 게 이 나려 현실입니다."

정리해 보면, 누군가 청부살인을 사주한 것 같긴 한데 아직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현지 경찰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필리핀 경찰의 수사능력 상이 문제도 해결이 요원해 보인게 솔직한 느낌이었습니다.

● 올들어 한국인 피살 9명…모두 '총격'

올들어 필리핀에서 살해된 한국인 9명은 모두 총기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범인 검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원한'에 의한 '청부 살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필리핀은 '총기 소유 허가' 국가이지만 100만정의 총기가 불법 유통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는 한 교민은 필리핀 직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총은 너무 쉬워요, 구하기가… 필리핀 애들이 사진으로 총을 막 보여주며 그래요. 필요하면 하나 사줄까?"

더 놀라운 것은 청부살인 비용입니다. 대사관 영사의 말입니다. "100만 원? 150만 원? 많아봐야요. 그 정도에 한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거… 여기선 흔한 일입니다."

박외병 전 필리핀 주재 경찰영사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 정도 돈이면 거금이거든요. 평생 한번 만져보기도 힘든 돈입니다. 그 정도 돈을 주면 필리핀 사람들은 뭐..주저없이 청부살인을 할 겁니다."  

● 사업하려면 현지인 지분 60%…청부살인 주체는 '현지인'?

그렇다면 필리핀에서 이런 청부살인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누굴까요?

우선 필리핀의 현지법이 범죄를 부추길 수 있습니다. 필리핀이 은퇴의 천국으로 떠오른 것은 '값싼 생활비'로 알려져 있지만(그 얘긴 뒤에 하겠지만) 은퇴비자를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필리핀 은퇴 은행에 1만~5만 달러를 예치하면 손쉽게 은퇴비자를 받고 정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할 수 없습니다.

필리핀 현지인의 지분을 60% 이상해서 사실상 '넘버1' 주인으로 내세워야 법인 허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보통은 필리핀 동업자 외에도 가정부나 운전기사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든 필리핀인이 돌변하면 상황은 뻔해지겠죠. 

한 교민 사업자가 전해준 실제 상황입니다.

"올 초인가, 지난해 말 얘긴데요, 어느 분이 한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 슈퍼마켓을 하셨는데, 여직원 이름으로 슈퍼마켓을 차린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쫓은 거죠. 직원이 개인 경호원을 고용해서 '내 거니까 나가라' 이런겁니다. 그리고는 물건을 현지인들에게 싸게 팔아대기 시작한 겁니다."

이 정도면 다행입니다. 좀 나쁜 생각이긴 해도 경제 빈곤에 시달리는 필리핀 현지 사정을 감안하면 '실제 주인인 한국인만 없으면 이 모든 가게는 내거다'란 유혹을 받는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거란 생각도, 솔직히 들었습니다.

박외병 전 필리핀주재 치안 영사의 말입니다. "필리핀 사람은 돈이 없어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100% 돈을 다 내고, 필리핀인은 바지 사장을 하는 거죠. 꼭두각시 사장으로 앉히는 건데, 이러다보면 이 사람들이 회사를 통째로 소유하기 위해 한국인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어요."

● "한국인이 제일 무섭다"…교민의 무서운 고백

그런데, 마닐라 외곽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교민 김 모씨는 살인사건에 대한 취재 도중 한마디를 불쑥 내뱉었습니다. 

"한국인이 제일 무섭습니다"

김 씨는 6년전 이민왔습니다. 가장 믿었던 한국인 동료에게 비자 사기를 당했습니다.

"내가 보내 준 돈으로 다른 곳에 유통해 버린겁니다. 여기 생활이 힘들다보니까, 내게 제일 중요한 비자 문제를 뒤로 미뤄버린 거죠."

일이 꼬이면서 남은 재산을 다 탕진하고 이혼까지 당했습니다. 불과 6개월만에 빈털터리가 됐습니다. 이제야 살만해졌지만 그 때 이후 한국인을 만나는 게 무서워졌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살아있는게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입니다. 솔직히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많이 안 좋아요. 서로 무지 경계해요. 전 집에서 나오지도 않아요. 한국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않아요."

그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대부분 한국인이 저지르는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술집, 카지노가 근처에 무방비로 열려 있어요. 그런데서 다 탕진하고 나면 궁해지잖아요. 그러면 보이는 게 한국 사람들, 돈 좀 가진 한국 사람들이에요. 아무 것도 모르잖아, 그런 사람들..그러다보니 서로 불신의 골이 깊어지죠."

그는 인터뷰 내내 불안해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 한마디로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며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대부분의 한인 총격 살해사건은 외딴 저택이나 현장에서 일어났습니다. 특이하게도 현지인들이 '빌리지'라고 부르는 고급 주택단지나 고급 아파트에선 이런 참극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보안'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필리핀은 지난 2006년부터 은퇴이민지로 각광받아왔습니다. 200만원 정도면 저택에, 가정부에, 기사에… 1년 내내 골프를 칠 수 있다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습니다. 그런데 현지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의 말은 달랐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지출 항목이 있었습니다.

● 생각을 초월하는 생활비…'보안' 비용

김미숙(가명)씨는 9년전 자녀 학업 문제로 필리핀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자녀 교육이 끝난 지금은 골프가 좋아 아예 정착을 결심했습니다. 김 씨가 살고 있는 곳은 마닐라 근교의 고급 주택단지입니다. 무장 경비원 10여명이 항시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단지 안에 골프장도 있고 마트도 있고, 단지 밖에 나갈 일이 거의 없습니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이민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최근 이사를 했습니다. 단지 내에 가장 작은 집으로 옮겼습니다. 방 5개짜리 2층집에서 방 3개짜리 집입니다. 월세며 식비, 전기세까지 지출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은퇴이민에 대해 뭐 150만 원이면 살수 있다? 200만 원이면 산다? 그런 방송이 나갔었죠. 그런데 엑스, 엑스에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월세만 해도 200만원 훌쩍 넘죠. 식비도, 한국식으로 먹어야 되잖아요. 다 수입품이죠? 엄청 비싸요. 전기값도 수도값도 너무 비싸요."

사업가 윤 모씨는 필리핀 시내의 고급 아파트에 삽니다. 그와 함께 단지를 들어가는데 무장 경비의 간단한 검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경비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차를 들여보내줬습니다. 역시 안전한만큼 월세도 만만치 않습니다.

"방 한칸짜리 월세가 100만원 정도 합니다. 방 세칸 짜리면 250~300만 원 정도요. 안전한 지역으로 가면 물가가 싸지 않아요. 한국보다 더 비싸요. 유명한 지역은 강남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걸요."

하다못해 상점을 하려해도 무장 경비를 꼭 써야 합니다. 생각치도 않았던 비용, 보안 비용이 어마어마하지만 목숨을 지키기 위해선 필수 지출항목입니다. 

● 외곽지역으로 옮겨가는 한인들…그러나 치안은?

그러다보니 왠만큼 여유가 있지 않다면 생활비나 사업비용을 줄이기 위해 외곽으로 나가는 한국인들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카비테 주에서 총격에 숨진 희생자들 모두 외곽의 저택에서 변을 당했습니다. 안전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단독주택이었습니다.

현지 가이드는 사건 현장을 취재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 시내 땅값이 비싸서 돈을 좀 아끼시려고 이쪽에다 집을 짓고 사시다 이렇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이런 곳은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워요. 이렇게 으리으리하게 집 지어놓고 담도 높게 쳐 놓고, 사람들이 지나가면 궁금도 하겠지만… 외국 사람이 산다고 하면 일단 외국인은 돈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특히 은퇴자들의 특성상, 고립된 지역에서 타인과의 교류를 반기지 않는 것도 안전면에서는 큰 불안 요소입니다. 한국 대사관 영사의 말입니다.

"은퇴 이민의 특징이 간섭받기 싫다..아닙니까. 내가 여기에 조용히 살고 싶어서 여기 왔는데 누구하고 어울려? 아예 재외국민 등록도 안하고, 한인회 이런거 신경쓰기 싫고, 나는 여기서 조용히 골프나 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시죠." 

물론 선택은 자유입니다.

이른바 이민 성공자들은 필리핀 문화에 대한 이해, 필리핀 현지인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들과의 융화가 이민의 성공 열쇠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또 하나 확실한 것은, 열악한 치안이 개선되기 어렵다면, 또 우리 외교관의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이라면 이민자는 원한 살 일을 피하며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이방인이란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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