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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쓰러진 노인…곁에는 갓난쟁이 손녀만이 '처참'

이보다 더 처참한 죽음은 없다

[월드리포트] 쓰러진 노인…곁에는 갓난쟁이 손녀만이 '처참'
'명화 극장'류의 TV 프로그램에서 본 흑백영화였습니다. 제목조차 기억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입니다. 그런데도 대사 한 구절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또렷합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흑인 여성입니다. 갓난 아이를 데리고 신산한 삶을 이어가다 한 배우 지망생을 만납니다. 그녀 역시 미혼모였습니다. 주인공은 비슷한 처지의 배우 지망생의 집에 들어가 뒷바라지를 시작합니다. 친언니처럼, 친어머니처럼 헌신적으로 돌봅니다.

배우 지망생은 당대의 대스타로 발돋움합니다. 주인공은 끝없이 닥쳐오는 개인적 불행을 묵묵히 인내하며 대스타의 그림자로 살아갑니다. 흑인 여성의 삶이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대스타는 그녀의 희생과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들어줄테니 소원을 말하라고 합니다.

"뭘 바라고 살지 않았습니다. 신경 쓸 것 없어요. 다만 제 장례식이 화려했으면 좋겠어요."

대스타는 약속을 지킵니다. 주인공은 마치 그 자신이 대스타였던 것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장례식 속에 세상의 배웅을 받습니다.

어린 마음에 의아했습니다. 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장례식이 거창한들 무슨 소용일까? 하고 많은 소원 중에 하필 화려한 장례식을 원했을까?

나이가 들고 나서야 그녀의 바람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그녀에게 장례식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증거하는 표상이었습니다. 다른 여성의 그림자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살았지만 그 또한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었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독사는 인간이 말년에 겪는 가장 처참한 형벌입니다. 내 존재가 스러져가는 순간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모두에게서 조용히 잊혀집니다. 살기 위해 고투해온 내 노력들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내 삶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처참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얼마 전 중국 언론에서 화제가 된 한 여성의 죽음은 더 끔찍할 수 있겠다 여겨졌습니다. 죽어가는 순간 고독이나 허무조차 우습게 여겨질 엄청난  걱정과 근심, 안타까움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안후위성 쑤저우시에서도 한참 나가야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 허름한 시골집 문 앞에 촌민들이 모여 문을 두드립니다. 한참을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자 사다리를 가져다 담을 넘습니다. 현관문을 억지로 따고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마을 주민 장 모 씨의 말입니다. "그날 아침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마을에 사는 자신의 어머니 후모씨가 며칠째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걱정되니 집에 가서 살펴봐줄 수 없냐고 부탁했습니다. 생각해보니 후 씨와 그녀의 갓난쟁이 손녀를 정말 요 며칠 통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후 씨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거실 바닥에 후 씨는 쓰러져 있었습니다. 입과 코에는 피가 가득했습니다. 이미 며칠이 지났는지 피는 바짝 말라 있었습니다. 더 끔찍한 광경은 그녀 옆에 함께 쓰러져 있는 이제 겨우 한 돌이 된 손녀였습니다. 얼굴과 손은 파랗게 질리다 못해 거의 검게 변해 있었습니다. 숨을 쉬는 지조차 알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급히 경찰에 신고하고 구급대를 요청했습니다. 의료진이 황급히 찾아왔습니다. 후 씨에게서는 생명 징후를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손녀 딸은 미약하나마 맥이 있고 숨도 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읍내 병원으로 후송했습니다.
[취재파일] 우상욱
병원 의료진의 설명입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기의 혈당과 체온, 심박수, 호흡 등이 모두 정상에 한참 못미쳤습니다. 생명 징후도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신생아실로 보내 체온 유지기에 넣고 영양 수액을 링거로 투입했습니다. 수일 동안 영양 수액을 맞으며 고비를 넘겼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더 이상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후 씨의 사인은 이랬습니다. "후 씨는 뇌출혈을 일으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올해 44세니까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만, 평소 건강이 썩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고혈압이 심했습니다. 갑자기 뇌출혈이 찾아왔는데 한돌짜리 손녀 밖에 없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없었죠."

아기의 병상 곁을 지키고 있는 엄마를 현지 언론들이 만났습니다. "남편과 저는 대도시에서 농민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일 하면서 딸을 돌 볼 수 없어 고향 어머니께 맡겨 놨습니다. 평소 평일에는 어머니와 딸 아이에게 가볼 수조차 없죠. 주로 전화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안 받았습니다. '어디 마실 가셨나?' 일이 바빠 별 생각 없이 넘어갔죠. 그런데 사흘 연속 전화를 받지 않는 거예요. 우리 부부는 겁이 더럭 나서 주변 친척과 이웃들에게 집에 가서 봐달라고 했죠.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후 씨의 최후는 이렇습니다. 손녀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밀려옵니다. 참을 수가 없습니다. 뭔가 큰 일이 났구나 싶어 구조 요청을 하러 거실로 기어 나옵니다. 하지만 채 전화기를 잡지도 못하고 쓰러져 의식을 잃어갑니다.

갓난쟁이 손녀는 배가 고파서, 또는 아무 인기척도 없는데 무서워서 울며 할머니에게 기어왔을 것입니다. 할머니를 아무리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계속 울어댑니다. 울다 울다 지쳐 소리가 잦아듭니다.

후 씨는 세상을 떠나면서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그리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도, 아무도 나의 최후를 지켜봐주지 않는 것도, 누구의 배웅을 받지 못하는 것도, 내가 얼마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나 확인하지 못하는 것도 부차적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없으면 삶을 유지하기 힘든 저 손녀를 어떻게 하는 걱정과 근심, 죄책감, 안타까움만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나를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우리 손녀를 살려주세요' 속이 터질 만큼 외치다 돌아가시지 않았을까요?
[취재파일] 우상욱
중국 언론들은 이번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농민공 수는 2억 5천만 명에 이릅니다. 농민공들이 도시로 나가 돈을 버느라 고향에 남겨진 어린이의 숫자는 8천5백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후 씨와 같은 조부모와 함께 삽니다. 노인이 젊은이 하나 없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살다 후 씨 처럼 돌연사를 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없을 만큼 어리거나 장애라도 있다면….

세계 양강 중국이 풀어야 할 숙제는 참으로 많습니다. 후 씨의 죽음도 운이 나빴다 여기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처참합니다. 중국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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