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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수사받는지도 몰랐는데 구속?…이상한 범죄인 인도

[취재파일] 수사받는지도 몰랐는데 구속?…이상한 범죄인 인도
볼일 보고 오겠다며 경찰서를 찾았던 남성이 석 달 까까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일 해결하겠다고 찾아간 경찰서였는데, 경찰서 컴퓨터 안에는 오히려 이 남성이 '수배자'라고 돼 있었습니다. 50년 넘게 살면서 경찰 조사도, 법원의 재판도, 단 한 번도 받아본 일이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수배자가 돼 있었습니다. 아니, 수배자 정도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구속영장까지 발부돼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성은 경찰서에서 검찰로, 그리고 곧바로 구치소로 이송돼 수감됐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흉악범죄를 저지른 유영철도, 오원춘도 구속이 되기 전엔 당사자가 직접 법정에 서서 법원의 판단(영장실질심사)을 받은 뒤에야 구속이 됐는데, 이 남성은 도대체 얼마나 큰 중범죄를 저질렀기에 어디에 호소 한 번 못 해보고 즉석에서 구속이 된 걸까요? 더군다나 이 남성은 한 가정의 가장이자 멀쩡한 중소기업의 대표였습니다. 대체 왜 볼 일 보러 자기 발로 찾아갔던 경찰서에서 돌연 구속이 돼 수감이 된 건지, 사연은 이랬습니다.

● 기술력을 인정받던 중소기업

이헌석 씨는 기계공학자입니다. 서울대학교를 나와서 평생 엔지니어로 살았습니다. 1997년 충북 청원에 드디어 자신의 회사를 세웠습니다. 기계설비를 만드는 중소기업의 대표였지만, 경영은 대체로 가족에게 맡기고 자신의 전공에 걸맞는 연구개발에 더 열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기계를 개발했다고 자신했습니다. '터보 블로워'라는 압축기인데, 대부분의 산업현장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핵심 기계입니다. 이 씨가 개발한 블로워는 기존 제품보다 전력소모를 40% 감소시켜주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해외 유수의 업체들이 기존에 쓰던 블로워를 이 씨의 블로워로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블로워 기술력 세계 1위인 독일의 한 대기업은 이 씨의 회사로부터 블로워 제조 기술을 사가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표창부터 온갖 엔지니어 관련된 상을 휩쓸었습니다. 언론에 기사도 참 많이 나왔습니다. 그럴수록 이 씨는 연구개발에 더욱 몰두했습니다.
김종원 취재파일

● 미국 14개 주와 물건 납품 계약 체결

 미국에도 이 씨의 기술력이 소문이 났습니다. 2009년 미국의 14개 주정부는 자신들의 폐수처리장에 이씨의 기계를 설치하기로 하고 이 씨와 납품계약을 맺었습니다. 한국에서만 사업을 하던 이 씨는 미국 시장에 진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경제사정이 참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 씨가 미국 14개 주와 계약을 체결할 바로 그 무렵, 오바마 정부는 'ARRA법'이라 불리는 경제부흥법을 시행합니다. 그 골자는 이른바 'Buy America'. 미국의 관공서에는 무조건 Made in USA 제품만 납품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씨의 모든 제품은 한국 청원에 있는 공장에서 만들어졌습니다. Made in Korea이지요. 이렇게 되면 납품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이 씨와 논의를 했고, 미국에 지사를 하나 세우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방식은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반정도 만들어진 반제품을 미국 지사로 보내면, 미국 지사에서 완제품으로 조립을 합니다. 그러면 'Made in USA'가 되고, 문제 없이 관공서인 폐수처리장에 납품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시 미국 환경청은 이런 방식에 전혀 문제가 없다며 사업 허가 승인까지 내주었습니다.
김종원 취재파일

● 미국 관공서엔 '미국산'만! 깨져버린 계약

미국 사업을 시작한 지 1년쯤 뒤,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부 주에 대해 납기일을 맞추기 어려워 진 겁니다. 한국에서 반 만 만들어진 제품을 미국으로 보내 완전히 조립하는 방식으로는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려 제 때 물건을 대지 못할 상황에 처한 겁니다. 계약이 펑크가 날 수도 있는 상황, 당시 회사 경영 전반을 맡고 있던 이 씨의 동생은 해서는 안 될 결정을 내리고야 맙니다. 한국에서 완전히 조립을 한 뒤 미국으로 완제품을 보내자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비용은 더 들지만, 시간은 맞출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품 포장지에 'Assembled in USA', 그리나까 '미국에서 조립'이라는 표시를 버젓이 적었다는 겁니다. 당연히 이렇게 해서 미국으로 보내진 제품은 미국 세관에서 걸렸습니다. 누가 봐도 한국에서 다 만들어서 보내는 완제품인데 포장에 '미국에서 조립했음'이라고 적혀있으니 안 걸릴 수가 없겠죠. 이런 식으로 일종의 '원산지표기위반'을 범한 계약이 14개 주 가운데 6개 주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 씨는 미국에서 해당 제품을 모두 압류당하고, 막대한 벌금을 내고, 조달 계약과 권한이 취소됐습니다. 미국 관공서와의 좋은 계약이 물건너갔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규정을 어긴 것은 사실이니까요. 사건은 그렇게 끝이나는 듯 싶었습니다.

● 청천벽력 날벼락 "당신은 구속됐습니다"

5년여가 흐른 올해 1월 9일. 이 씨는 대전 집 앞에 있는 경찰서를 찾았습니다. 사업 차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는데, 컴퓨터를 두들기던 경찰은 무언갈 보더니 이 씨를 잠깐 와보라며 불렀습니다. 모니터에는 이 씨 자신이 '수배자'가 돼 있었습니다. 경찰들도 왜 이 씨가 수배된 것인지는 몰랐습니다. 단지 '범죄인인도요청'과 관련된 건이라고만 돼 있었습니다. 경찰도 이 씨도 영문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이 씨는 수배자였고 그대로 검찰로 보내졌습니다. 이 씨를 넘겨받은 검찰은 역시 서류를 검토해보더니 청천벽력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 씨를 구속하고 구치소로 이송했습니다. 체포도 아닌 구속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모든 일이 너무나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이 씨는 지금까지 경찰 조사를 받아본 일도, 누구와 마찰을 빚은 일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법원에 불려간 적도 없었고, 어디가서 사고를 친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별 일 없이 자기 일만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구속이 된 겁니다. 가장 궁금한 건 단 한 차례의 통보도 받지 못한 상태로 구속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구속은 영장실질심사를 거쳐서 판사가 발부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껏 이렇게 멀쩡히 있다가 수감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랴부랴 변호사를 사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알아낸 사실은 바로 앞서 설명했던 미국 폐수처리장 납품 건이 문제가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 조사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사기꾼' 된 사연

구치소에 들어가 알아보니 이헌석 씨는 미국 연방주 검찰에 의해 '사기미수' 혐의로 기소가 돼 있는 상태였습니다. 원산지표기위반 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행정처분을 당하고, 미국에서의 사업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것이 2010년 즈음. 다 끝난 줄 알았지만 2년이 지난 2012년, 미국 연방 검찰은 돌연 이 씨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이 씨는 최초 계약을 맺을 때 딱 한 번을 빼고는 미국에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미국 검찰이 자신을 수사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국 검찰이 알아내고자 한 것은 '이 씨가 애시당초 최초 계약 시점부터 미국에서 만든 제품을 납품할 의사와 능력이 없으면서 납품 계약을 체결했는가' 였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씨는 명백한 '사기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검찰의 조사 방법은 다소 황당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이 씨 당사자에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미국 지사에서 퇴직한 직원들을 찾아다니며 진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진술만을 토대로 이 씨에게 '사기미수'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씨가 한국산을 미국산으로 속여서 납품할 마음을 갖고 계약을 체결했다고 결론 내린 겁니다. 그리고는 미국 검찰은 이 씨를 기소했습니다. 이 씨에 대한 배심원 재판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씨에 대한 '범죄인인도요청'을 우리 정부에 해 왔습니다. 미국 검찰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국에 사는 이 씨는 단 한차례의 통보도 받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까맣게 몰랐단 겁니다.

● '범죄인인도요청' 당사자에 알리지도 않고 2년 반을 뭉갠 법무부

더 황당한 것은 이 씨에 대한 '범죄인인도요청'을 받은 우리 법무부입니다. 인도요청서를 받은 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요청을 거부하지도, 이 씨에 대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당사자인 이 씨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 한 채 2년 반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지난해 연말 법무부는 이 씨에 대한 인도 절차를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법조계 고위 관계자는 별 대답을 하지 않는 우리 법무부에 미국 측이 강하게 항의를 해 왔다고 합니다. 그 항의를 받은 법무부가 부랴부랴 뒤늦게 일처리에 나섰단 거지요. 먼저 검찰이 이 씨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이 씨를 사전구속부터했습니다. 법원은 이 씨를 미국에 인도를 할 지 말 지를 판단했는데, 이 역시 일사천리로 '인도를 허가한다'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결국 이 씨는 이달 말 혹은 다음달 초 미국 교도소로 이송됩니다.
김종원 취재파일

● 오원춘도 재판받고 구속되는데…

많은 법조인들인 이 씨가 구속된 것이 너무 과한 처사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일이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속절차 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범죄였다면, 앞서도 언급했지만, 아무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구속이 되기 전에 변론의 기회를 갖습니다. 바로 영장실질심사 절차입니다. 이 씨 정도의 위법행위(원산지표기위반)라면, 또 이 씨 정도의 신분(중소기업 대표)이라면 당연히 '불구속'이 됐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불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신원이 확실하고, 도주와 증겨인멸의 우려가 없다면 중범죄가 아닌 이상 구속을 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씨는 전과도 없는데다, 이렇게 원산지표기위반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인데, 자신이 구속 되는 지도 모르게 어디 한군데 연락 한 번 받지 못하고 구속됐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범죄인인도요청 건에 한해선 '영장실질심사' 과정이 없이도 구속을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씨는 외국인도 아닌 한국인인데, 오히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다른 외국인(오원춘)보다도 더 심한 인권침해를 당한 셈입니다.
김종원 취재파일

● 단 한번으로 끝나버린 '인도 결정'

게다가 범죄인인도신청에 관한 심사는 단심제, 즉 단 한번의 재판으로 끝이 납니다. 이 씨는 직접 재판장에 서지도 못한 채 미국으로의 인도 결정이 났는데, 그냥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더이상 변론을 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냥 미국으로 갈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내 범죄였다면 아무리 흉악범일지라도 '3심제'이기 때문에 항소를 할 수 있었겠지만 이 씨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3심제를 채택하고 있거나, 재심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 있지만, 우리는 그런 것 없습니다. 결정되면 그냥 가는 겁니다.

● 美 검찰 "당신은 사기범"…이 씨는 정말 '사기범'일까?

이 씨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원산지 표기를 위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검찰의 주장대로 '사기'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미국 검찰이 '사기'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이 씨가 처음부터 'Made in USA' 제품을 납품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의도적으로 '계략'을 세우고 계약을 체결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실제 14건의 계약 가운데 원산지표기위반을 한 것은 6건에 불과합니다. 만약 미국 검찰의 주장대로 처음부터 속일 생각을 하고 계약을 맺었다면 6건만 원산지표기위반을 했을 리가 없겠지요. 물론 이 부분은 법정에서 가려져야 할 부분입니다.

법정에서 가려져야 할 부분.. 뭔가 이상한 것 눈치 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이 씨가 '사기미수'가 맞는지는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지만 확실히 되는 부분인데, 이 씨는 단 한번의 변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아니 자기가 그런 혐의를 받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덜컥 구속부터 됐습니다. 이 씨가 사기미수를 저질렀다는 것은 미국 검찰의 주장일 뿐, 법적으로 그 어떤 판단도 내려지지 않은 상탭니다. 누가봐도 명확한 '원산지표기 위반'에 대한 것은 이미 14억 원에 달하는 물건을 압류당하고 벌금을 내고 계약이 파기되는 행정처분을 통해 처벌을 모두 받았습니다. 이 씨는 지금 국가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법무부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 형평성에 맞지 않는 한미 범죄인인도 요청

우리 정부가 이 씨의 뒤늦은 호소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범죄인인도요청을 밀고 나간 것은 한가지 원칙에 의해서입니다. '한미범죄인인도조약'에 따른 상호주의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요구할 때 한 명을 보내주어야 나중에 우리가 필요한 범죄인을 인도받을 수 있단 겁니다. 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법무부 말대로 우리가 한 명을 보내주면 한 명을 받았을까요?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으로 범죄인을 인도한 사례>

1. 조직범죄 피의자(한국계 미국인). 미국에서 총기강도를 벌여 260년 형을 선고받은 뒤 한국으로 도망 (2002)
2. 살인 피의자 (한국계 미국인). 미국에서 살인을 하고 국내로 도망 (2008)
3. 횡령 피의자 (한국국적의 사진가). 미국에서 26만달러 횡령혐의로 재판을 받던 도중 한국으로 도망 (2007)


미국인 두 명, 한국인 한 명. 강력범죄 두 명, 경제사범 한 명. 공통점은 모두 미국에서 저지른 범죄행위란 겁니다. 범죄의 질 역시 몹시 좋지 않았고, 마지막 경제사범으로 분류된 한국인의 경우는 미국 재판에서 본인의 혐의를 대부분 시인한 상태에서 도주를 했다는 특수성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2002년의 1번 사례는 우리가 요구했던 범죄자를 미국과 1:1 맞교환을 한 사례였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미국에서 죄를 저지르고 한국으로 도망친 미국인 범죄인을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낸 사안이라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나라로 범죄인을 인도한 사례>

1. 살인 피의자 (미국인). 한국에서 자신의 친구 미국인을 살해하고 미국으로 귀국 (2002)


이게 끝입니다. 그나마 이 것도 위의 1번 사례와 1:1맞교환을 한 사롑니다. 하지만 미국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범죄가 이것 한 건만은 아닐텐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 한 건 이외에 미국에 범죄인인도 요청을 한 사례가 없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요구를 해도 미국이 들어주지 않고 있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 '이태원살인사건'…잔인한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는 여전히 안 오는데

1997년 이른바 '이태원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햄버거가게 화장실에서 한국인 대학생을 미국인 두 명이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합니다. 화장실에 유혈이 낭자했고, 경찰은 현장에서 용의자 두 명을 체포합니다. 그러나 한 명은 무죄로 석방되고, 유력한 용의자였던 아더 패터슨은 우리 검찰의 실수로 미국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2011년 검찰은 미국 측에 아더 패터슨을 범죄인 인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행히 미국은 이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김종원 취재파일

그런데 4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패터슨은 인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본인이 '범죄인인도 결정'에 불복해 계속 재심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 나시죠? 앞서 우리나라에는 범죄인인도요청 심사의 경우 딱 한번의 재판으로 끝나는데다가 재심을 청구할 수도 없게 돼 있다고요. 한 마디로 양국 제도 자체가 형평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아무리 미국 정부가 한국으로 범죄인 인도를 하기로 결정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두번, 세 번 재심을 청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송환은 몇년이고 기약없이 늦춰지게 되는 겁니다.

● 9년째 감감무소식, 론스타 코리아 전 대표 스티븐 리

이른바 '먹튀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이른바 론스타 사태 기억하실 겁니다.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많은 사건입니다. 당시 우리 검찰은 론스타 코리아의 대표였던 재미교포 스티븐 리를 조세포탈과 횡령 등의 혐의로 조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 리는 미국으로 귀국을 해버렸죠. 검찰은 미국 측에 범죄인인도요청을 했습니다. 그게 2006년의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국 정부는 스티븐 리의 범죄인인도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을 안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의 거절입니다. 반인륜적 범죄가 아닌 경제사범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 '자국민불인도원칙', '자국민보호 의무'는 어디에?
김종원 취재파일

법학자들은 우리 법 체계에는 '자국민 불인도 원칙'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자국민은 정말 중한 범죄나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닌 이상 타국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반면 미국은 우리와 법체계가 약간 달라 '자국민불인도 원칙'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대그때 상황에 맞게 자국민일지라도 필요하다면 인도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사례에 의하면, 오히려 우리나라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자 마자 본인에게 단 한번의 변론의 기회도 주지 않은채 사전 구속부터 시키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미국으로 범죄인 인도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범죄도 아닌, 행정처분으로 끝날수도 있는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말이지요. 반면 자국민이라도 인도하겠다는 미국은 우리의 범죄인 인도 요청에 답을 안하기 일쑤입니다. 설사 인도를 해준다고 하더라도 재심, 삼심 제도를 통해 언제 인도가 될 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호주의 원칙'만을 주장해 한 사람의 인권이 침해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취재진이 만난 법학자들은 대부분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 "사법주권 포기했다" 일부 법조인의 지적

사실 이 씨 정도의 사안이라면 충분히 국내에서 재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에 'Made in USA' 딱지를 붙인 행위는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고, 이를 과연 '사기미수'로 봐서 미국으로 보내야 할 것인가를 충분히 논의를 하고 판단을 했어야 합니다. 아니면 아예 '무역법 위반'을 적용해서 우리나라에서 재판을 하고 우리나라에서 처벌을 했어도 될 일입니다. 하지만 법원의 인도결정문을 보면 과연 우리 법원이 이 씨의 미국인도를 심사숙고했는가 의심이 듭니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너무나 쉽게 미국으로 보내겠다고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법조인들이 '사법주권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 "'범죄인인도' 제도 보완 필요하다"
김종원 취재파일

제도의 헛점도 보입니다. 취재 도중 만난 국회 법사위원장 이상민 의원은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나라 제도의 헛점을 발견했다며 공론화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즉, 범죄인인도요청이 들어온 피고인의 경우, 인신이 구속이 되는 상황임에도 자신을 변론할 기회가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을 뿐더러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단 겁니다.

미국 검찰이 '사기범'이라고 밀어부쳤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기범으로 몰린 이 씨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씨가 기댈 곳은 국가 뿐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가게 하지 말아달라고 매달렸지만, 우리나라는 너무나 냉담했습니다. 미국사정은 우리보다 미국이 더 잘 알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 재판을 받으라며 미국으로 보내겠다고 결정했습니다. 많은 법조인들이 말도 안되는 처사라고 분개하고 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아 이 씨는 이제 한 달 안에 꼼짝없이 미국 교도소에 수감될 판입니다. 지금이라도 법무부장관이 미국으로의 인도를 취소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과연 자국민을 이처럼 쉽게 외국으로 보내도 되는 것인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 미국 범죄자는 안 오고…자국민만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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