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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판결문에 드러난 '땅콩 회항'의 실체

[취재파일] 판결문에 드러난 '땅콩 회항'의 실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 대한 판결문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선고가 내려졌던 지난 12일엔 뉴스 시간에 맞춰 보도하느라 경황이 없었던 데다, 판결문의 분량도 방대해 정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판결문은 A4 용지로 73쪽에 달합니다.

판결을 통해 새로 드러난 내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당사자들의 의견이 달랐는데, 이번 판결로 정리된 내용도 있습니다. 물론, 이번 판결은 확정된 게 아닙니다. 조 전 부사장은 1심 선고 직후인 13일 항소를 했습니다. 조 전 부사장은 1심 재판에서 일부 세부적인 내용을 다투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사실 관계를 대체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만약 조 전 부사장이 항소심에서 사실 관계를 다시 다툴 경우 이번 판결에서 인정된 내용이 일부 바뀔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조현아 "무릎 꿇고 매뉴얼 찾아"…결국 자신이 틀려

아시다시피, 이번 사건은 여승무원의 마카다미아 서빙에 대해 조 전 부사장이 "매뉴얼에 맞느냐"고 시비를 따지면서 시작됐습니다. 여승무원이 미개봉 상태의 봉지에 든 마카다미아를 쟁반에 받쳐 가져와 "견과류도 드실지" 묻자, 조 전 부사장이 "이렇게 서비스하는 게 맞냐"고 되물었던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승무원이 맞았습니다. 조 전 부사장은 여승무원이 "매뉴얼에 맞게 서빙한 것"이라고 답하자 즉시 매뉴얼을 가져오라고 지시합니다. 당시 안전 동영상 상영을 준비하던 박창진 사무장은 여승무원에게서 상황을 전달받고 1등석 칸으로 가 매뉴얼이 저장된 태블릿 PC를 조 전 부사장에게 가져다 줬습니다. 조 전 부사장은 "내가 언제 태블릿 PC를 가져오랬어, 갤리인포를 가져오란 말이야"라고 고함쳤습니다. '갤리인포'는 기내 서비스 매뉴얼을 리플릿 파일로 만든 것입니다.

박 사무장이 뛰어가 갤리인포 파일철을 가져오자 조 전 부사장은 박 사무장에게 "누가 (매뉴얼이) 태블릿에 있다고 했어?" 버럭 화를 내며 팔걸이에 얹힌 박 사무장의 손등을 파일철로 3~4회 내리쳤습니다. "아까 서비스했던 그 X 나오라고 해, 당장 불러와"라고 고함쳤습니다.

여승무원이 놀라 조 전 부사장 앞으로 나오자, 조 전 부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다음과 같이 소리칩니다. "야 너, 거기서 매뉴얼 찾아. 무릎 꿇고 찾으란 말이야. 서비스 매뉴얼도 제대로 모르는데 안 데리고 갈 거야. 저 X 내리라고 해."

박 사무장이 "이미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서기 시작해 비행기를 세울 수 없다"고 하자, 조 전 부사장은 "상관없어, 네가 나한테 대들어? 어디다 대고 말대꾸야"라고 고함치면서, "내가 세우라잖아"라고 서너번 반복 지시했습니다. 현지 JFK 공항은 주기장이 좁아 10미터 정도만 이동해도 다른 비행기의 통행에 장애를 주는 구조여서, 사전 통제 없이 멈추면 사고가 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멈출 무렵 박 사무장이 여승무원 옆으로 와 조 전 부사장에게 "죄송합니다"라고 말했고, 조 전 부사장은 "말로만 하지 말고 너도 무릎 꿇고 똑바로 사과해"라고 했습니다.

조 전 부사장은 화를 참지 못해 갤리인포 파일철을 여승무원에게 집어 던기기도 했습니다. 여승무원의 어깨를 밀쳐 출입문 쪽으로 끌고 간 뒤 파일철을 돌돌 말아 벽을 수십 차례 내리치며 "너 내려"를 반복했습니다.

진실은 잠시 뒤 밝혀졌습니다. 다른 승무원이 태블릿 PC에서 매뉴얼을 찾아 부사무장을 통해 조 전 부사장에게 전했습니다. 매뉴얼을 읽은 조 전 부사장은 또 큰 소리를 칩니다. "사무장 그 XX 오라 그래." 달려온 사무장에게 조 전 부사장은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이거 매뉴얼 맞잖아, 네가 나한테 처음부터 제대로 대답 못해서 저 여승무원만 혼냈잖아, 다 당신 잘못이야. 그러니 책임은 당신이네, 네가 내려."

이렇게 해서 승객 247명을 태운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보다 24분 늦게 출발해 11분 늦게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고도 조 전 부사장은 한국에 있던 여 모 상무에게 이메일을 보냅니다. "콩 서비스 하나 제대로 못해 승무원을 내리게 하고, 비행기를 지연시켜야 하는지, 담당자 모두 각자 임무에 대한 문책을 할 것이니 월요일 팀장 회의 전까지 이메일로 보고하십시오."

● "정부기관? 다 대한항공에 있다 간 사람들"
대한항공 취파
대한항공과 국토교통부의 '부적절한 관계'도 여러 군데서 드러났습니다. 먼저, 여 상무는 공항에 도착한 박 사무장을 대한항공 본사 사무실로 데려와 경위서를 5~6 차례 쓰게 했습니다. 박 사무장이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적자, 여 상무는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써야지, 이렇게 써 갖고 되겠어. 다 본인 잘못이라고 써야 할 것 아니냐. 우리끼리는 네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 쓰면 윗사람이 좋아 하겠어"라며, 경위서 말미에 '이번 일에 책임을 통감하며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라는 문구를 넣게 했습니다. "너 회사 오래 다녀야 되잖아, 정년까지 안 다닐 거야"라고도 했습니다.

박 사무장은 국토교통부 조사에 대해선 "국토교통부는 정부 기관이기 때문에 거짓 진술을 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그러자 여 상무로부터 "무슨 정부기관이냐 정부기관이. 다 우리 대한항공에 있다가 간 사람들이야. 아무 문제 안돼"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 감독관들은 박 사무장 등에 대한 조사에 여 상무가 동석하도록 허락했고, 박 사무장 등에 대한 질문에 여 상무가 대신 대답했는데도 19분 동안 방치했습니다. 한 감독관은 조사를 받은 여승무원에게 "검찰에 가서 여기서 말한 것과 다르게 말하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한항공 직원들이 국토부에 조사받으러 올 때도 여 상무 등 회사 임원, 간부들이 대상자들을 인솔해 오게 했습니다.

이런 국토부 감독관들의 행태는 결국 조 전 부사장에게 '일부 무죄'를 안겨 줬습니다. 검찰은 조 전 부사장과 여 상무가 국토부 조사를 방해했다며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를 추가했는데, 재판부는 두 사람이 조사를 방해했다기보다 국토부 감독관들이 '스스로' 불충분한 조사를 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물론, 조 전 부사장의 다른 혐의, 즉 항공보안법 위반과 강요, 사무장과 승무원에 대한 업무방해 등의 혐의는 모두 유죄로 인정했습니다.

● 재판부, "국민 기억서 흐려질 것" 우려

재판부(재판장 오성우 부장판사)는 조 전 부사장의 양형을 설명하는데도 A4용지 7장을 할애했습니다. 조 전 부사장이 재판부에 제출한 반성문도 공개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제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당시 마음 한 켠에 '이래도 될까'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제 행동의 저지선은 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어떻게 느낄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 제게는 그것이 많이 부족했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조 전 부사장은 박 사무장과 여승무원에게 사죄의 뜻을 표하면서 큰 교훈을 준 '평생의 스승'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실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돈과 지위로 인간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간의 자존감을 무릎 꿇린 사건"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조직이 한 사람을 희생시키려 한 사건"이었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심이 있었다면, 직원을 노예쯤으로만 여기지 않았다면,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승객을 비롯한 타인에 대한 공공의식만 있었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으로 봤습니다. 그러면서 조 전 부사장과 함께 1등석에 탔던 승객의 진술을 인용했습니다. "비행기를 자신의 자가용마냥 후진시켜 수백 명의 승객들에게 피해를 줬고 땅콩과 관련한 서비스가 그렇게 크게 잘못한 것인지 너무 화가 났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이 쉽게 잊혀질 것도 우려했습니다. 조 전 부사장의 아버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박 사무장의 정상 근무를 약속하긴 했지만 사회적 지지가 사라지면 언제든 박 사무장이 힘든 상황을 겪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국민들은 생계 문제로 기억에서 금방 흐려지게 될 것"이라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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