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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줄서기'의 일본, 함정에 빠지다…도쿄역 대소동을 보며

[월드리포트] '줄서기'의 일본, 함정에 빠지다…도쿄역 대소동을 보며
일본을 상징하는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줄서기'일 겁니다.

어지간한 맛집이나 공연장 앞에는 항상 '긴 줄'이 늘어서 있기 마련이죠. 심지어 지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같은 재난 상황에서도, 일본 사람들은 지하철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일본 사람들 스스로 줄서기를 '일본인의 질서의식'을 상징하는 것 쯤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런 줄서기가 과해서 큰 소동이 났습니다. 도쿄역 역사가 그려진, 100주년 기념 '특판 정기권(suica)' 때문에 벌어진 소동입니다. 

지난 토요일(20일), 개장 100년을 맞은 도쿄역 모습입니다.  
특판 정기권

일본 철도공사 격인 JR東日本은 모두 15,000장의 '기념 정기권'을 준비했습니다. 1장에 2천엔, 1인당 3매로 제한해서 오전 8시 45분부터 판매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부터 1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도쿄역사에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줄을 섰습니다. 오로지 도쿄역에서만 판매하기 때문에, 멀리 교토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JR측은 예정된 시간보다 더 빨리, 오전 7시가 조금 지나서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줄'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면서, 역사 밖에도 만 명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안팎이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특판 정기권

역사 안팎으로 구불구불 줄은 이어졌고, 사람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위험하다" "밀지 마라" 곳곳에서 날카로운 충돌음이 났습니다. 특히 JR측은 당초 '밤샘 줄서기'를 허용하지 않기로 했는데, 철야로 줄을 선 1,500명 정도에게 그대로 '특판 정기권'을 팔면서 사람들이 더 화가 났습니다. 결국 사고를 우려한 JR측은 판매 개시 1시간 만에 '특판 정기권' 판매 행사를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 커졌습니다. 일방적인 판매 중단에, 특히 멀리서 돈 들여 찾아온 사람들이 폭발했습니다. "행사를 이따위로 준비했느냐" "차비 돌려줘라" "사과해라"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뒤늦게 도쿄역을 찾은 사람들까지 가세하면서, 도쿄역이 더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사실 8년 전인 2006년에도 도쿄역은 비슷한 행사를 기획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특판 정기권'을 판매했는데, 당시에는 큰 혼란없이 행사가 잘 끝났습니다. JR측은 그 때 기억에 따라(매뉴얼에 따라) 이번 행사를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혼쭐이 난 겁니다. 도쿄역 직원들이 모두 나와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고, "차비를 돌려드리겠다"는 약속도 해야 했습니다.

도쿄역은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특히 고령자들에겐 '추억의 장소'입니다. 또 '열차 오타쿠'까지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열차 사랑'은 각별하죠. '특판 정기권'을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넘쳐나는 겁니다.

운 좋게 '특판 정기권'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어젯밤부터 기다렸다" "가족의 추억이 얽힌 곳이라,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TV 인터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옥션 사이트에는 '특판 정기권'을 비싼 값에 되팔겠다는 사람까지 등장했습니다. 2천 엔 짜리 정기권이 수만 엔까지 치솟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면 'JR의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죠. JR은 오늘(22일) "모든 희망자에게 특판 정기권을 판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판매 시기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인터넷 접수 등을 받아서 판매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특판 정기권'이 더 이상 특판이 아닌 셈이 됐습니다.

'줄서기'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이 '줄' 때문에 큰 소동을 겪게 된 건데, 지켜보는 마음이 조금 복잡했습니다. 일본인의 '줄서기' 문화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볼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매뉴얼의 일본'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흔히들 일본을 '매뉴얼 사회'라고 부르죠. 저는 가끔 일본이 '매뉴얼(을 과신하는) 사회'라고 느낍니다.

'줄서기'라는 아날로그적 해법(매뉴얼)에 대해, JR 스스로 인정했듯이, "甘かった(안이했다. 조금 더 의역하자면, 생각이 짧았다 쯤 되겠죠)" 라는 생각입니다. 인터넷 등을 활용한 간단한 수요조사, 공사중인 도쿄역 상황 등을 감안하면 아날로그적 해법(줄서기)을 과신할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을 충분히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JR 내부에서 아무도 "다른 방법이 좋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특판 정기권' 판매 행사와 관련해, JR 내부에서 '매뉴얼'에 벗어난 의사결정은 아마 단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지난 2006년 행사 경험에 따라 차근차근 진행했겠죠. 도쿄역사에서 줄을 선 사람들도 '매뉴얼'에 따랐습니다. 줄을 잘 섰습니다. 그럼에도 '소동'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도쿄역 대소동은, '매뉴얼' 일본의 장점과 한계가 동시에 드러난 소동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매뉴얼보다 임기응변과 상황 논리만 따르다 보면 더 큰 문제에 부딪히겠죠. 우리의 경우는 후자에 더 가까운 편이니, '매뉴얼'의 중요성을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매뉴얼'에 대한 강조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즉 '현장의 자율성'을 억누르게 된다면, 아니 배운만 못 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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