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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유교 터에서 쏟아진 불교 유물…소유권은 어디로?

[취재파일] 유교 터에서 쏟아진 불교 유물…소유권은 어디로?
최근 문화재청이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불교 유물을 대거 공개했습니다. 모두 77점입니다. 단연 주목을 받은 유물은 '금강령'과 '금강저'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77점을 늘어놓고 보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유물 2점입니다. 그 2개만 금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75점의 유물은 모두 청동입니다. 푸르스름한 유물 사이에서 은은한 금빛을 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는 듯 했습니다.

'금강령'과 '금강저'를 놓고 보면, 금강령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둘 다 이름이 낯섭니다. 불교 유물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절에 가서 금강령을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제가 조계종에 전화를 걸어 금강령을 물어봤을 때도, 네? 뭐라고요? 하는 게 첫 반응이었습니다. 고려 시대 금강령을 당시 모습 그대로 쓰는 절은 지금 없습니다. 그렇다고 안 쓰는 건 아닙니다. 지금은 무척 단순화한 형태로 사찰의 법당 안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요령'입니다. 손잡이가 달린 작은 금속 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요령' 소리가 크지는 않습니다. 종 자체가 한 손으로 쉽게 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고, 그 소리는 법당 안에만 넉넉히 울려 퍼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고려 시대 금강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입니다. 다만 종 표면에 새겨진 도상들은, 지금껏 우리 불교 역사상 발견된 금강령 가운데 단연 으뜸이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금강령이 전시돼 있는데, 그것과 비교해도, 도상의 섬세함과 보관 상태가 국보나 보물급으로 전혀 손색없다는 얘기입니다.

역사적 가치는 또 있습니다. 종 하나에 오대명왕과 사대천왕, 그리고 범천과 제석천을 모두 새겨 넣은 건 불교 문화권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했습니다. 언론도 '처음'을 좋아하는 것처럼, 문화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처음'에 상당한 무게를 두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은 또 있습니다. 금강령 안에 혀(설)라고 부르는, 딸랑딸랑 종의 방울 역할을 하는 게 있는데, 물고기 모양의 혀가 완전한 형태로 나온 것도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이 하나 더 있습니다. 금강령의 손잡이 부분을 보면 동그란 구멍이 하나 나 있는데, 사리를 넣는 사리공입니다. 이 사리공이 있는 금강령이 발견된 게 국내 최초라고 합니다. 이렇게 '처음'이 3개나 됩니다.
도봉서원 유물

궁금한 게 생깁니다. 이번 불교 유물은 12세기 중반 이전의 것이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습니다. 900년은 넉넉히 됐다는 뜻인데, 유물 상태가 무척 좋습니다. 금강령에 새겨진 오대명왕, 사천왕의 얼굴도 보이고, 손에 뭘 들고 있는지도 보입니다. 금강령의 물고기 모양 혀는 비록 삭아서 종 속에서 떨어져 나오긴 했지만, 물고기 표면을 보면 비늘까지 선명합니다. 장시간 보존 처리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은은한 금빛을 발할 정도로 금동 표면의 상태도 좋아 보였습니다. 한 마디로, 900년 전의 유물처럼 보이지 않고, 근대에 잘 만든 유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비결은 그걸 묻은 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누군가, 이 불교 유물을 모아 커다란 향로에 쏟아 넣고 건물의 기단부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유교의 상징인 서원을 지었습니다. 유교는 밀어주고, 불교는 억누르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른 것입니다. (조선 시대 백운동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터에 있던 절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도봉서원을 세웠는데, 다행히 금강령을 비롯한 유물은 태워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물을 묻은 그 누군가는, 큰 향로 위에 뚜껑 역할을 하는 대야까지 덮어주고, 겉에다 거적을 감쌌습니다. 거적에서는 약간의 정성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기단부에 안전하게 묻어놓은 것입니다.

서울 도봉서원은 그렇게 불교 유물을 품게 됐습니다. 수백 년간 우여곡절이 잇따랐습니다. 서원은 1573년 서울 도봉산에 생겼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때 땅속 불교 보물은 눈에 띄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1608년 도봉서원은 같은 이름으로, 같은 자리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러다 1871년 서원은 다시 허물어졌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문입니다. 수십 년이 또 흐른 뒤 1903년, 유림이 제단을 복원했습니다. 그때까지도 기단부는 아무도 허물지 않았습니다. 2012년, 도봉구청이 왜소해진 도봉서원을 조선의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고 땅을 갈아엎었고, 금강령은 그제야 수백 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유물들은 향로 안에 그대로, 고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조선 시대 도봉서원이 들어서기 전, 그곳에 무슨 절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화재청은 보도자료에서 그곳이 '영국사' 터라고 밝혔습니다. 율곡전서 등 문헌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고 했습니다. 고려 시대 영국사가 있던 자리에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도봉서원을 지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기자들을 상대로 한 브리핑에서 공개된 사진을 잘 보면, 한 유물에서는 '영국사'가 아니라 '도봉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문화재청은 왜 그런지, '도봉사'를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기자들의 질문이 잇따랐습니다.

문화재의 소유권 때문입니다. 땅에서 출토된 문화재의 경우, 소유권은 그 땅주인에게 귀속되는 게 원칙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은 땅주인이 아니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임자인데, 땅속에서 나온 문화재는 누가 대신 발견했어도 내 땅에서 나왔으면 내 것입니다. 도봉서원의 터는 4,100㎡ 정도 되는데, 이 가운데 국가가 소유한 땅이 3,000㎡ 정도고, 나머지 1,100㎡가 도봉서원 땅입니다. 근데 유물들이 문화재청 입장에서는 '하필' 서원 땅에서 나온 겁니다. 이게 불교 유물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절을 없애고 서원을 지었던 미안함 때문인지, 도봉서원은 유물이 발견된 2012년 이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절차를 거쳐 국가에 귀속될 것 같습니다.

이제 '도봉사'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 있습니다. 도봉사는 지금도 도봉산에 있는 사찰입니다. 도봉서원 근처에 있습니다. '영국사'는 지금 없습니다. 옛 문헌을 보면, 도봉사는 고려 시대 때부터 있던 절로 나옵니다. 시기는 영국사가 창건되기 이전입니다. 즉 '도봉사→영국사→도봉서원' 순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도봉사가 고려 도봉사와 같은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유물에서 '도봉사'라는 글자가 딱 나왔고, 도봉사라는 절은 지금도 있으니, 문화재청으로서는 도봉사에서 유물이 자기들 것이라고, 달라고 하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것입니다. 문화재청은 가치 있는 유물을 공개하면서도, 이게 알려지면서 소유권에 다툼이 생길까봐 무척 조심하는 눈치였습니다. 900년 전 선조와 공감하고, 고려를 느끼는 듯 하다가도, 막상 눈앞의 소유권을 따져봐야 하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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