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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죽음의 도시' 필리핀 타클로반을 가다 ②

[취재파일] '죽음의 도시' 필리핀 타클로반을 가다 ②
11월 13일(수) 타클로반 날씨는 흐림, 때때로 비

-출장 3일차. ‘타클로반 진입. 절망의 땅. 죽음의 땅’
타클로반 취재파일

▲ 인천공항에서 필리핀 세부섬에 도착한 SBS 타클로반 취재팀은 파란색 경로처럼 세부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레이테섬 올목항에 도착했다('죽음의 도시' 필리핀 타클로반으로 가다 (1) 편 참조). 몇몇 한국 언론사들이 외교부 신속대응팀 직원들과 함께 세부 공항에서 미 공군 수송기 편으로 타클로반 공항에 직접 들어간 것보다는 다소 힘겨운 경로였다. 취재팀은 올목에 도착해 출장 첫 뉴스를 보도한 다음날 새벽 3시, 노란색 경로를 따라 차를 타고 타클로반 진입을 시도했다. 현지인 운전기사는 평소라면 빨간색 경로를 통해 산길을 가로질러 2시간 만에 타클로반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노란색 경로를 선택했다. 치안이 무너진 상황에서 강도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눈이 번쩍 떠졌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레이테섬 올목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한 뒤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산길을 피해 북쪽으로 돌아왔지만 긴장은 덜해지지 않았다. 운전기사에게 물어봤더니 1시간 가까이 더 가야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밖에는 태풍에 쓰러진 야자수가 즐비했다. 20분을 더 달렸다. 그러자 저 멀리 차와 사람들이 한데 몰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착했냐고 운전기사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운전기사도 불안한지 한 무리의 사람들을 향해 차를 천천히 몰았다. 총을 든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빠르게 옷부터 살폈다. 천만다행히 필리핀 군복이었다. 도시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상대로 군인들이 검문검색을 벌이고 있었다. 강도가 아니라는 안도감에 한숨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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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몸을 수색하는 필리핀 군인들. 검문검색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봤더니 사람들의 상의를 들어올려 허리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현지인 운전기사에게 물어봤더니 흉기나 권총을 숨겨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총을 들고 사람들의 몸을 수색하는 군인들을 보자마자 우리는 반사적으로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 텁텁하면서 매캐한 공기가 순식간에 코로 밀려왔다. 갈 길이 머니 서둘러야했다. 마이크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이 곳에서 30분을 더 가야 타클로반이 나오는데 무장한 군인들이 여기서부터 검문검색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지 언론은 타클로반 곳곳에서 강도가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총을 든 군인 앞이라 긴장했는지 멘트를 여러 번 틀렸다. 다행히 검문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나니 바로 옆 주유소에서는 기름을 얻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줄을 선 현지인들은 타클로반 안에 모든 주유소가 폐쇄된 상태라고 답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연료가 담긴 통을 가방처럼 맨 채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을 타클로반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검문소를 뒤로 하고 우리는 타클로반 시내로 차를 몰았다. 해는 이미 높이 떠오른 뒤였다. 아침 7시. 우리는 어둠과 강도를 피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타클로반이다. 우리는 ‘죽음의 땅’ 타클로반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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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석 선배가 뉴스 리포트용 ENG 카메라로 촬영한 동영상 가운데 한 컷을 캡쳐했다. 취재파일에 포함된 여러 사진은 이렇게 SBS 영상취재 카메라에 담긴 영상에서 캡쳐한 것이 많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타클로반 외곽 지역에서부터 주민들은 옷과 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잔해 속에서 우리는 타클로반의 첫 번째 시신과 맞닥뜨렸다. 코를 찔러오는 악취에 우리는 말이 없어졌다.

 20분 정도를 더 달렸다. 쓰러진 야자수 말고 무너진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캐한 냄새는 밀도를 점점 더해갔다. 준비해온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앞자리 조수석에 앉아있던 황 선배가 창을 다 내린 뒤 상체를 내밀기 시작했다. 뒷자리의 김승태 기자는 황 선배의 허리춤을 잡았다. 타클로반에 들어가는 순간을 주행샷으로 촬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황 선배가 창문을 연 순간부터 냄새는 더 짙어졌다. 황선배가 밖을 찍고 있는 동안 우리는 촬영할 만한 장면이 있을까 밖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 때였다. 우리가 앞으로 일주일 동안 고생할 이 냄새의 원인을 처음으로 발견한 순간은. 거적때기 하나 덮여있지 않은 거무튀튀한 시신들이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건물 몇 개마다 한 구씩, 시신의 팔 다리가 보였다. 필리핀인 피부색보다도 훨씬 까만 피부가 사망 시간이 오래됐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뒤틀리고 배가 부푼 시신까지, 수습기자 때부터 적지 않은 시신을 봐 왔지만 이렇게 길가에 널린 시신은 처음이었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이 없어진 우리는 타클로반 중심가로 차를 재촉했다.

 첫 번째 행선지는 어제부터 동행한 필리핀인 부부의 부모님이 살던 집이었다. 우리가 오늘 새벽 타클로반 외곽 지역에서 검문검색 장면을 촬영하고 있을 때 이 부부는 친척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녀왔다. 안타깝게도 친척도 부모님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고 소식을 전했다. 부부 중 부인인 리아구 씨는 타클로반에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집이 있는 곳을 본 뒤에는 거의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울먹이는 리아구 씨에게 "혹시 우리가 도울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소식이 끊긴 부모님과 형제 자매의 이름을 부탁했다. 정갈한 글씨를 내 수첩에 남긴 채 세부항에서부터 함께한 필리핀인 부부는 그렇게 부모를 찾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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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으로 가족과 연락이 끊기자 타클로반으로 직접 가족을 찾으러 온 리아구 씨. 집은 온데간데없었고 근처에 사는 친척마저 부모님과 언니, 동생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혹시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름을 묻는 우리에게 또박또박 가족들의 이름을 정성스레 남겼다. 가족들을 찾았을지, 지금도 궁금하다.

 부부를 내려준 지점과 가까운 타클로반 공항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카메라가 마이크가 있어서 그런지 활주로에 들어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활주로에는 미군 수송기로 보이는 비행기에서 미군을 비롯한 외신 기자단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활주로 한편에는 구호물자로 보이는 자루들이 쌓여있었다. 구호물자와 공항을 배경으로 스탠딩을 찍은 뒤 항공편 운항 상태를 확인했다. 미군 수송기가 이착륙을 하고 있었고 공항 운영이 조금씩 재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곧 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은 타클로반 시내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타클로반의 폐허를 생생하게 촬영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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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 공항은 미국 군용 수송기를 비롯해 여러 항공기가 구호물자를 실어 내려놓고 있었다. 공항이 재개됐다는 것은 구호 인력과 물자가 계속 들어온다는 뜻이다. 복구가 곧 활발해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 내내 타클로반 시내를 돌아다녔다. 폐허로 변한 항구와 무너진 건물들, 널브러진 시신이 몇 시간 만에 낯설지 않은 광경이 됐다. 멀쩡한 건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필리핀인들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진 저층 가옥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강력한 태풍이 들이 닥치면 막을 방법이 없다. 태풍의 세기를 이겨내지 못한 건물은 순식간에 사람을 해치는 잔해로 변해 집에 있던 이들을 덮친다. 해안가에 가까운 거대한 거주 지역은 이렇게 아무 건물도 남지 않은 허허벌판이 됐다. 벌판의 한 복판으로 들어갈 때 까지 멀쩡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몇몇 주민들이 자신들의 집이 있던 곳에서 옷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어느 집, 어느 건물에 그려져 있었을까. ‘I lOVE TACLOBAN’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덩이만 덩그러니 내버려져 있었다. 수천 채의 집들이 있던 곳은 그렇게 적막만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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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수천 채의 집들이 빼곡했을 이곳이 한 순간에 폐허로 변했다. 멀리 파란 바다와 하얀 구름이 보였다. 사람이 살던 곳에는 부서진 집의 잔해만 남아있었다. 폐허 가운데로 들어가는데 햇빛이 쨍하니 내렸다. 태풍이 할퀴고 가기 전에는 분명 평화롭고 살기 좋은 마을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폐허 한 쪽에서는 옷가지라도 챙겨가려는 사람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잔해를 뒤집고 있었다. 사진은 김승태 기자가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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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 도로에 나란히 뉘어있는 시신들. 검은 천 겉에 하얀 표시는 이름표다. 이렇게 이름표라도 붙은 채 가려져 있는 경우는 차라리 다행이다. 부패는 막을 수 없어도 나중에 가족들이 시신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뒤 이 시신들은 현지 군과 경찰에 의해 어디론가 옮겨졌다. 그 옆에는 오열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열할 가족들조차 없는 시신들이 타클로반에는 너무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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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벽에 새겨진 'I LOVE TACLOBAN'. 수천 채의 집이 있던 이 지역은 단 한 채도 집이 남아있지 않았다. 부서져 옆으로 누워버린 이 돌 벽이 타클로반의 현재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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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를 타고 타클로반 시내를 둘러본 뒤 이동을 시작했다. 다음 행선지는 UN이나 현지 주정부 등이 마련해놨을 것으로 예상되는 재난통제센터였다. 이제 곧 세계 각지의 구호 인력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고 식량과 물을 나눠줄 장소도 필요할 터, 우리도 이에 맞춰 정보를 수집하고 취재 동선을 확보하기 위해 센터를 찾아 나섰다. 이번 출장 기간 동안 우리의 가장 큰 과제 가운데 하나인 '송출 포인트'를 찾는 것도 중요한 목표였다. 어떤 영상을 촬영하고 어떤 내용을 취재해도 한국으로 보내지 못하면 뉴스에 내보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적절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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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 시청 앞에 설치한 SBS 타클로반 취재팀의 송출 베이스 캠프. 이곳은 타클로반 진입 첫 날을 제외한 다음날부터 일주일 뒤 타클로반을 떠날 때까지 우리의 송출 베이스 캠프로 쓰였다. 이 날부터 며칠 뒤까지 이곳은 타클로반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자 휴대전화를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노트북은 촬영한 영상을 파일로 추출한 뒤 잘게 잘라 전송하기 적당한 크기로 만드는 '가편집 전용 노트북'이고 왼쪽 노트북은 이 영상들을 위성 장비를 통해 한국으로 송출하는 '송출 전용 노트북'이다. 나는 기사를 주로 이동 중에 수첩이나 휴대전화로 작성한 뒤 한국에 전화로 구두로 불러 전달했다. '송출 전용 노트북'만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데, 영상 파일을 보내기도 벅차 인터넷으로 기사를 송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 있는 SBS 국제부원들도 전화로 기사를 불러줬다. 나는 선배들이 읽어준 기사를 녹음한 뒤 받아 적고 8시 뉴스 시간에 맞춰 송출했다. 일주일 동안 이렇게 기사를 전화로 읽어 보내고 받아 적는 상황이 반복됐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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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해온 영상을 편집하는 SBS 타클로반 취재팀의 황인석 기자와 김승태 기자. 황인석 기자가 촬영해온 영상을 잘게 나누어 가편집해놓으면 김승태 기자가 위성장비가 연결된 송출용 컴퓨터를 통해 한국으로 전송한다. 위성장비는 방향만 살짝 바꿔도 전송이 끊기기 때문에 송출할 때 우리 모두는 굉장히 예민한 상태가 됐다. 이 사진을 찍을 때도 황 선배와 김승태 기자는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적절한 송출 포인트를 잡은 뒤 우리는 한국인 소방대원을 찾아 나섰다. 오늘 한국인 소방대원 2명이 선발대로 들어와 구호 활동에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나라던 상관없이 소방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만 보이면 잡고 묻고 또 묻기를 몇 차례. 우리 소방대원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온 구호단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렇게 우리는 김용상 119 국제구조대원을 만날 수 있었다. 숱한 재난 재해 현장을 경험한 김 대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타클로반에서 방역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김 대원은 태풍이나 수해가 덮치면 사람은 두 분류로 나뉜다고 했다. 죽는 사람과 사는 사람. 그러나 이렇게 나뉠 뿐 부상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김 대원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복구 활동과 함께 방역이 매우 중요해진다는 것이었다. 방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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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 시청에서 만난 김용상 119 국제구조대원. 김 대원은 우리나라 구호팀이 공군 수송기로 들어오기 전까지 현지에서 국제 구호팀들과 사전 조율을 하고 있었다. 며칠 뒤 40명 규모의 우리 구호팀이 들어왔을 때 헤매지 않고 빠르게 구호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김 대원의 노력 덕분이었다.

 김 대원이 다른 나라 구호팀 대표들과 회의를 끝내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이었다. 다. 타클로반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딸과 사위가 위험에 처했다며 연락을 취해줄 수 있냐는 전화이었다. 어제 8시 뉴스가 나간 이후로 SBS 보도국과 내가 갖고 있는 필리핀 현지 휴대전화로 타클로반에 있는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계속해서 걸려오고 있었다. 전달받은 번호로 전화를 거니 연결이 되지 않았다. 세부에서 마련해온 현지 전화로 시도했더니 한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타클로반에서 수년 째 선교활동을 벌여온 사공세현 목사였다. 어제 타클로반에 대규모의 폭동이 일어나 어린 딸들과 부인, 그리고 다른 선교사 부부와 함께 한밤중에 다른 도시로 도망을 쳤다는 내용이었다. 태풍으로 타클로반 형무소가 부서졌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재소자가 뛰쳐나와 도시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 날 타클로반에서는 필리핀 당국이 의료팀이나 구호팀을 향해 강도를 벌이는 폭도들에 대해서는 발포를 허가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사공 목사는 이 폭도들이 부서진 형무소에서 나온 재소자들이었다고 했다. 이 내용은 우리 8시 뉴스를 통해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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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 현지 선교사들도 위험에 빠져있었다. 무법천지인 그 곳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대피하기란 만만치 않은 노릇이었다. 우리에게도 한인들의 안전은 중요했기 때문에 정보가 들어오는 속속 대사관 측에 전달을 했다. 다행히 좋은 결과가 있었다. 뉴스를 성공적으로 보도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 순간 우리는 정말 큰 보람을 느꼈다.

 사공 목사는 자신의 가족과 이웃에 살던 한인 목사 가족 등 8명이 고립돼있다고 했다. 폭도들을 피해 어제 새벽 타클로반에서 남쪽으로 차로 1~2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로 숨어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데리러 올 수 있는지 도움을 요청했다. 승합차를 가지고 있는 우리 팀이었지만 리포트를 송출해야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이동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해 사공세현 목사 가족을 비롯해 한인 8명이 머물고 있는 장소와 사공 목사의 전화번호를 전달했다. 많은 직원들이 타클로반에 들어와 한인 교민들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상황이 급했기 때문에 주 필리핀 한국 대사의 휴대전화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했다. 사공 목사 일행의 휴대전화 배터리가 떨어지고 있었고 교통편이 없어 위험한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다행히 상황을 전해들은 우리 대사관 측은 곧바로 차량을 이용해 사공 목사 가족 등 한인 8명을 구해냈다. 전날 모닝와이드 팀이 타클로반 공항에서 한국인 10명의 안전을 확인해 대사관에 전달한 데 이어 SBS 타클로반 취재팀이 이번에는 8명을 직접 구해오도록 정보를 제공한 것이었다. 사공 목사는 며칠 뒤 타클로반 공항을 빠져나갈 때 한 번, 우리 취재팀이 일정을 마친 뒤 세부에서 철수할 때 한 번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어린 세 딸을 둔 사공 목사는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뿌듯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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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호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 총영사가 어제 모닝와이드 팀이 한국인들의 안전을 확인한 뒤 전달한 정보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SBS 타클로반 취재팀도 타클로반 진입 첫 날 한국인 8명의 소재와 연락처를 확인해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 측에 전달했다. 통신도 전기도, 차량도 마땅치 않은 타클로반에서 취재팀과 한국 대사관 측이 협조해 한인들의 안전을 도모했던 결과다. 우리는 이 일로 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과 외교부 신속대응팀 직원들과 일종의 동지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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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 시청에 차린 송출 베이스 캠프에서 찍은 SBS 타클로반 취재팀 단체 사진. 뒤에 있는 공간은 세계 각지에서 온 외신 기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캠프를 꾸린 곳이다. 우리는 위성 장비를 하늘을 향해 설치해둬야했기 때문에 야외에 탁자와 의자를 구해와 이렇게 바깥에 송출 캠프를 꾸렸다. 타클로반에 온 뒤 거의 일주일 동안 우리가 이곳을 이른바 '점령'했는데, 외신 기자들 모두 이 자리를 SBS팀의 자리로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우리가 아침과 오후 내내 취재를 다니다 오후 5시쯤 송출을 하러 돌아오면 이 자리는 다른 나라 취재팀이나 휴대전화를 충전하려는 타클로반 주민들로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하면 모두가 자리를 비켜주는 분위기였다. 황인석 기자 왼편에 보이는 사람은 스웨덴 라디오 방송의 기자였는데 우리가 오면 늘 반기며 인사를 건네곤 했다. 나중에는 외신 기자들과도 매우 친해져 서로 정보를 공유하거나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일종의 동지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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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일정은 취재를 마친 뒤 타클로반이 있는 레이테섬에서 2~3시간 거리에 있는 사마르섬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어제 타클로반에 도착하지 못한 채 올목의 한 호텔 로비에서 쪽잠을 잤기 때문에 체력도 많이 떨어져있었던 상태였다. 낮에 취재를 다니는 동안 먹은 것이라곤 물 조금과 한국에서 가져온 초콜릿과 비스킷이 전부였다. 레이테섬에 들어온 뒤 장비도 제대로 풀지 못해 점검도 필요했다. 사마르 지역은 타클로반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곳인데 상대적으로 태풍 피해가 적은 곳이었다. 특히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과 외교부 신속대응팀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머무는 호텔이 있어 정보를 공유하기에도 적절한 곳이었다. 우리도 이 호텔에서 머물 수 있도록 외교부 측에 부탁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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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에서 사마르 캣블로간으로 이동하는 경로. 타클로반이 있는 레이테섬은 우리나라의 면적에서 강원도를 뺀 것과 비슷할 정도로 큰데 사마르 섬은 그것보다는 조금 작지만 비슷할 정도로 큰 섬이다. 타클로반을 출발해 1시간 정도를 달리면 부산의 광안대교를 떠올리게 하는 긴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가면 사마르섬으로 들어선다. 우리 숙소가 있는 캣블로간은 사마르 섬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 8시 뉴스에 내보낼 리포트 송출을 호텔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취재를 마치고 오후 3시쯤 이동을 시작했다. 폐허가 된 타클로반을 지나 쓰러진 야자수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는 도로를 달렸다. 다행히 도로는 포장된 도로였는데 우리의 현지인 운전기사는 이때부터 어마어마한 운전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늦게 달리는 앞 차를 중앙선을 넘어 추월하는 것은 기본이고 수많은 오토바이들을 경적과 현지어로 길 한쪽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차를 몰았는데도 사마르 지역에 도착하는데 시간은 한참이 걸렸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이날 사마르 지역과 레이테섬 접경 지역에서 무장한 폭도와 필리핀 정부군의 교전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사마르에서 외교부 직원들의 차를 타고 함께 타클로반으로 넘어오던 다른 한국 언론사 취재팀은 이 날 타클로반에 아예 들어오지 못했다. 우리는 새벽 3시에 올목에서 차를 빌려 다른 경로로 타클로반에 들어왔기 때문에 무사히 타클로반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타클로반 진입 첫 날, 타클로반 곳곳을 헤집고 다닌 유일한 한국 방송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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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북동부 사마르 지역에 있는 우리의 숙소. '카사 크리스티나'라는 이름의 호텔로 주 필리핀 한국대사관과 외교부 신속대응팀으로 파견된 직원들과 한국에서 온 다른 언론사 취재팀들과 함께 머물렀던 곳이다. 좁고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호텔이었지만 어제 올목에서 밤을 샌 뒤라 숙소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깊은 감동이었다.

 4시간 정도를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에 들어서니 KBS, MBC를 비롯한 한국 언론사 취재팀이 이미 호텔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가 미 공군 수송기가 아닌 해로와 육로를 통해 들어왔다는 소식을 외교부 직원들로부터 들었던지 이틀간의 여정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부를 떠나온 뒤 처음으로 보는 한국인들이라 우리도 반가운 마음이었다. 전화로만 인사를 나눈 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과 외교부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해후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8시 뉴스용 영상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다행히 로밍을 해 간 휴대전화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이 호텔의 가장 위층에 있는 옥탑방을 황인석 기자의 방으로 잡았는데, 이 후부터 우리의 아침 뉴스용 리포트 송출은 모두 이 옥탑방 앞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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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사마르 지역의 카사 크리스티나 호텔 옥상의 모습. 아침 뉴스용 송출 캠프를 설치한 뒤다. 위 사진은 나와 황인석 기자가 오늘 찍어온 영상을 보며 회의하고 있는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우리의 장비가 모두 세팅된 모습이다. 이날 밤부터 우리는 8시 뉴스는 타클로반 시청에 설치한 송출 베이스 캠프에서 송출을 한 뒤 아침 뉴스는 이렇게 타클로반에서 사마르로 넘어온 뒤 옥상에서 송출을 했다. 재밌는 것은 이 호텔이 자체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는데 우리 팀을 비롯한 한국 언론사, 특히 방송사 취재팀이 노트북을 포함해 장비를 여러 대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툭하면 호텔 전체가 정전이 됐다는 거다. 호텔 직원들은 우리에게 연거푸 간곡히 장비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건 전혀 들어줄 수도 없고 들어줄 생각도 없는 요구였다. 이 때문에 빈번할 때는 거의 5분에 한 번꼴로 정전이 일어났는데, 나중에는 호텔 직원도 우리도 익숙해져 누구도 정전을 무서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아침 뉴스용 송출 장비를 설치한 뒤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햇반으로 오늘 하루 유일한 끼니를 때웠다. 생전 처음 가보는 사마르 지역에서 라면 국물에 말아 먹는 흰 쌀밥의 맛은 말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외교부 신속대응팀 직원들과 함께 내일 일정을 논의한 뒤 아침 뉴스용 기사를 쓰고 목소리를 녹음해 영상파일과 함께 한국으로 송출했다. 데스크와 내일 일정을 상의하고 취재 경로를 상의하고 나니 오늘 일정이 모두 마무리 됐다. 새벽 3시 올목에서 시작된 일정이 23시간 뒤인 새벽 2시 사마르에서 끝났다. 5시간 뒤 다시 타클로반으로 출발이다. 내일은 구호품을 실은 한국 공군 수송기가 성남 공항에서 출발해 타클로반 공항에 내린다. 한국 교민들을 비롯해 몇몇 취재팀은 내일 철수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환하게 떠오른 달과 서울보다 몇 배는 많아 보이는 별이 사마르 하늘을 수놓았다. 우리 취재팀은 '오늘은 정말 운이 많이 따른 날이었다'라는 말로 짧게 하루를 정리했다. 내일은 또 다른 행운이 따라주기를 바라면서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죽음의 도시' 타클로반 취재, 이제 겨우 하루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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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로반 공항의 해질녁 모습을 황인석 기자가 찍었다. 다음날 일정은 타클로반 공항으로 한국 공군 수송기가 구호물품을 싣고 들어온 뒤 한인 교민들을 싣고 나가는 것을 중심으로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우리 취재팀 가운데 누구도 우리가 이 수송기 때문에 다음날 엄청난 패닉에 빠질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타클로반 일정 가운데 가장 당혹스러웠던 순간, (3)편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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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필리핀 현지 르포 둘째날 / SBS 8시 뉴스 '"홍수에 교도소 문 열려"…필리핀 또 다른 위기'

11월 14일 필리핀 현지 르포 셋째날 / SBS 모닝와이드 '필리핀 약탈에 전염병 우려…한인 23명 연락두절'

[영상]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죽음의 도시' 필리핀 타클로반을 가다(3)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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