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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일본식 지명 '창지개명'의 흔적, 왜 못 지웠나?

[취재파일] 일본식 지명 '창지개명'의 흔적, 왜 못 지웠나?
송도, 인사동, 욱천, 원남동, 관수동, 태평로.

생뚱맞아 보이기도 하는 위 단어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지명이라는 것과 조선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럼 언제 생겨난 것일까요?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한 일본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창씨개명을 실시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름을 쓰는 것도 보지 못하겠다는 처사였죠.

그런 일본이 우리 지명을 가만둘 리 없었습니다. 일본식으로 바꾸기도 하고, 자기들 멋대로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기존에 있던 이름을 합성해서 이름을 만들고, 특별한 의미 없이 이름을 붙이고, 때로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쓰는 일본식 지명들

인사동_500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인사동은 관인방이라는 행정구역과 절이 있어서 대사동으로 불렸던 곳의 지명 한 자씩을 떼어내서 붙인 이름입니다. 옥인동이라는 명칭도 옥류동의 '옥'자와 인왕산의 '인'을 몇 대로 합성해 붙인 이름입니다.
많은 기업들의 사옥이 있는 태평로도 조선시대에는 없던 이름입니다. 중국 사신들이 묵던 숙소인 '태평관'이 있었다는 이유로 일본이 붙인 이름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는 다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아예 일본 등 다른 지명 이름을 차용해 붙인 이름도 있습니다.

지난해 녹색기후기금을 유치하고, 해외 대학 분교 등을 유치하면서 명실공히 국제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인천 송도가 그렇습니다. 송도의 한자 표기는 '松島'입니다. 섬도 아닌데 '섬(島)'이라는 명칭을 붙인 게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인천으로 주로 드나들던 일본의 전함 마츠시마의 한자 표기를 딴 게 송도입니다. '송도(松都)'의 일본 발음이 마츠시마인거죠.

일본이 자기네들의 일본 지명을 가져와 쓰고 있는 이름도 있습니다. 지금 원효대교 옆에 가면 한강으로 들어오는 지류 '욱천'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원래는 덩굴이 많다고 해서 조선시대에는 '만초천(蔓草川)'으로 불렸던 곳인데, 이 지천 주변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면서 일본어로 '아사히카와'로 불리는 '욱천'으로 바꾼 겁니다. '아사히카와'라는 지명은 일본에 4,5군데 있다고 하는데, 욱천의 '욱(旭)'은 욱일승천의 '욱'자로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글자라네요.

물론 일본식의 이런 지명 지금껏 많이 없어졌습니다. 1995년에는 인왕산(仁王山)이라는 명칭이 일본이 바꿔놓은 인왕산(仁旺山)에서 다시 제 이름을 찾기도 했습니다. 한강 가운데 있다고 중지도(中之島)라고 불렸던 노들섬도 같은 해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땅 이름 학회 조사결과, 아직도 서울 지명은 법정동 기준으로 30%는 일본식 지명이라고 하네요. 특히 원래 동네가 많기도 하고, 일본인들이 많이 몰려 살았던 종로구의 경우 약 60% 정도가 아직 일본식 법정동 명칭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기념일에만 관심 갖는 행정기관..변하지 않는 지명

우리나라 사람들 그리고 정부 기관들은 유난히 10년 단위가 되는 해를 기립니다. 올해는 1953년 7월에 있었던 정전 협정이 60주년이 되는 해라서 정전 협정과 관련된 정부 행사가 크게 치러졌습니다. 광복절도 마찬가집니다.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에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 등 유난히도 광복절 행사를 크게 치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인왕산이나 노들섬이 제 이름을 찾은 것도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의 일입니다.

문제는 이런 때가 아니면 정부기관이나 국민들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앞서 소개한 욱천의 예처럼 중앙지명위원회(현 국가지명위원회)가 지명 변경을 결정했지만 '욱천'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서울시나 지명 변경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지만, 요즘은 여론이 잠잠하기 때문에 전혀 지명 변경 의지가 없는 인천시의 모습에서 공무원들의 관심부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의지는 있지만 세심하게 그 의지가 반영되지 못하는 곳도 있습니다. 종로구의 경우 많은 지명이 일본식 지명인만큼 그것을 지우기 위한 노력도 다른 곳 보다 많은 곳입니다. 다른 지자체에 비해서 지명위원회의 활동도 더 활발한 편입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도 지명 변경에 적극적인 의지를 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적인 종로구 표기는 어떨까요?

조선시대에는 종로라는 명칭은 한자어로 '鐘路'라는 한자어가 주로 많이 사용됐습니다. 보신각이라는 종(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는 '鍾路'라는 한자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찌됐던 걸까요?

1943년 일본은 구제(區制)를 실시합니다. 지금과 같은 종로구, 서대문구와 같은 '구'라는 행정구역을 쓰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일제가 이 때 종로의 '종'자를 쇠북을 의미하는 '鐘'에서 술잔을 의미하는 '鍾'자로 바꿔버립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도 종로라는 명칭을 깎아내리기 위한 일종의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보니 서울시사편찬위원회는 종로라는 한자 표기를 '鍾路'가 아닌 '鐘路'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냅니다. 이후 종로구청도 종로구의원의 의견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추후에는 적극적으로 '鐘路'라는 명칭을 쓰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종로를 아니 종로구청을 가장 처음 접하는 홈페이지 상에는 여전히 '鍾路'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면 여기 저기 힘을 쓰고 다니지만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접하는 홈페이지 상의 종로 표기는 여전히 잘못하고 있으니 헛심 쓰고 있을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행정기관의 의지 부족 못지않게 지명 변경을 어렵게 하는 것은 이미 많이 늦었다고 할 정도로 지명 변경의 시기를 놓쳐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외래어든, 일본식 지명이든, 아니면 심지어 외계어든 오랜 기간 사람들에게 불리게 되면 그것 스스로가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의 입에 익어서 생명력을 가지게 되면 쉽게 바꿀 수가 없습니다.

◈주민 반대로 지명 변경이 무산되기도

2003년 서울시 등은 원남동이라는 지명을 바꿀 것을 추진했습니다. 원남동이 창경원의 남쪽이라는 의미로 일본이 지은 명칭이었는데, 창경원을 일본이 창경궁을 멋대로 동물원으로 만들어 깎아내린 명칭이니 그것을 계속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반대했습니다. 찬반투표에서 지명 변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지명변경을 제대로 추진해 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만큼 '원남동'이라는 지명이 입에 익고,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지명 변경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지명을 바꾼다는 것은 비단 일본식 지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쉽지가 않습니다. 때론 지명이 땅값이나 집값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니, 지하철역 이름을 정할 때 지명별로 알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이럴 진데 50~60년 된 지명을 일본식 지명이라고 바꾼다고 할 때 반발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바꾸는 것이 옳지만도 않습니다.

전문가들은 계기성이 있을 때 조금씩이나마 변화를 모색하는 게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조언합니다. 새로 건물을 짓거나, 지하철역을 만들거나 주소를 바꿀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주민들에게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고 그것을 바꾸는 것을 시도하는 게 주민 반발을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공무원의 성향과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발적으로 지명 변경은 기대하기가 힘드니 언론에서 지명 병행 표기 등을 통해서 분위기를 조성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저 스스로도 광복절이라며 관심을 표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웠습니다. 많은 사람들도 후세에 아니 우리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지금에라도 관심을 좀 가져야겠습니다. "왜 이런 지명을 아직도 안 바꾸고 있었어?"라는 질문과 항의를 받지 않으려면요. 

*이번 취재에는 배우리 땅 이름 학회 명예회장님과 나각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간사님의 연구 결과와 조언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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