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인 소재를 찾아라’, ‘고고한 예술가들의 얘기는 그만!’, ‘뉴스 시간이 넘치니 문화부 아이템을 빼겠다’… 방송뉴스에서 문화, 특히 내가 담당하고 있는 ‘공연’의 위치는 ‘도시락 속 파슬리’, 혹은 ‘케익 위의 크림꽃장식’ 같다. 구색으로 보아 넣기는 하는데,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먹기도 안 먹기도 애매하고, 먹는다고 배가 부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정한다. 경제 뉴스는 당장 내 주머니에서 들고 나는 돈 얘기다. 세금을 얼마 더 내고, 집값이 어떻게 움직이고, 먹고 사는 일들이다. 정치는 경제보다 더 내 삶의 방향과 직결되는 이야기들이고, 사회부 기사들은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아닌 문화는 ‘시청자들이 무거운 뉴스만 보기 피곤할까봐’ 쿠션용으로 배치될 때가 많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최근 서울시향의 ‘대표 퇴진’ 정도.) 신문처럼 특정 요일에 ‘문화면’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매일 큐시트 끝에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다가 스포츠 뉴스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방송되기 일쑤다.
● 존 말코비치 덕분에…
이 소식도 그랬다. ‘존 말코비치’라는 할리우드 배우가 아니었다면, 방송을 타지 못했을 것이다. 몇 달 전 ‘존 말코비치가 2015년 초에 한국에 온다더라. 그것도 클래식 음악회에 나레이션 하러” 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설마…” 였다.
말코비치가 누구인가. ‘사선에서’의 대통령 암살범, ‘콘 에어’의 비행기 탈취범 등 악역이 먼저 떠오르는 배우다. 심지어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도 문어 악당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가 있을 만큼, 성격파 배우 ‘말코비치’의 존재감은 크다. 그런 말코비치가 한국 연주단체(서울 바로크 합주단)의 연주회에서 나레이션을 한다고? 그런데 사실이었다.
● “이런 연주회는 처음”
그리고 어제(1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바로크합주단의 창단 50주년 연주회가 시작됐다. 세 번째 연주곡인 슈니트케의 피아노협주곡을 앞두고, 무대의 불이 꺼졌다. 피아니스트가 어둠 속에서 종을 흔들며 등장했고, 말코비치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낭송이 시작됐다. 무대에 조명이 서서히 다시 들어왔고, 연주에 맞춰 말코비치의 낭독이 이어졌다. 이 날 말코비치가 낭독한 책은 아르헨티나 작가 에르네스트 사바토의 ‘영웅과 무덤’ 중 ‘REPORT ON THE BLIND’ 였다. (리허설 장면을 담은 8뉴스 화면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공연장에서 만나는 말코비치…이색 연주회) '낭독'이라기보다 '대사'에 가까운 연극같은 분위기였다. 매끄럽지 못한 텍스트 번역과 읽기 편치 않았던 자막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의외의 신선한 협업에 관객들은 환호했다. 이 공연은 다음 달 런던과 베를린에서도 열린다.
● 어떻게 성사?
말코비치의 이번 출연은, 이번 연주에서 협연한 피아니스트 크세니아 코간과의 친분이 연결 고리였다. 코간이 슈니트케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다고 했을 때, 말코비치는 사바토의 책이 생각났고, 편집증적인 책의 스타일과 이 곡이 잘 어울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새롭게 한 번 해볼까 고민하다,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자신은 거기에 맞춰, 낭독을 하는 방식을 시도해보게 됐다고 한다.
● 고액 개런티?
출연료는 없었다. 왕복 교통비 정도만 받고 한국까지 날아왔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말코비치는 ‘음악 매니아’다. 이미 ‘GIACOMO VARIATION’과 ‘INFERNAL COMEDY’라는, 연극과 오페라를 합친 형태의 작품으로 세계 투어까지 했다. (물론 노래도 직접 했다.)
“제가 음악을 좋아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많이 알지 못하고, 새로운 걸 배우는 건 늘 재미있기 때문이죠.
둘째는, 클래식 음악가들과 작업하면서, 음악이 매우 강력하고 영감을 준다는 걸 알았습니다.
훌륭한 음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일 겁니다. 어느 것도 음악을 따라올 순 없어요.
음악은 아무리 복잡해도, 원초적인 힘이 있어요. 그게 바로 제가 음악을 듣고, 흥미를 느끼는 이유입니다.”
(따옴표 안은 말코비치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긴 부분.)
첫째는, 많이 알지 못하고, 새로운 걸 배우는 건 늘 재미있기 때문이죠.
둘째는, 클래식 음악가들과 작업하면서, 음악이 매우 강력하고 영감을 준다는 걸 알았습니다.
훌륭한 음악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표현일 겁니다. 어느 것도 음악을 따라올 순 없어요.
음악은 아무리 복잡해도, 원초적인 힘이 있어요. 그게 바로 제가 음악을 듣고, 흥미를 느끼는 이유입니다.”
(따옴표 안은 말코비치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긴 부분.)
말코비치는 특히 새로운 시도를 즐긴다.
“인생은 짧아요.
저는 영화 작업도 좋아하고, 텔레비전이나 연극도 좋아요.
인생의 대부분을 연기와 디자인에 쏟았죠.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융합적인 작업을 좋아합니다.
어려운 도전이지만, 그래서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공연은 제 목소리를 악기처럼, 언어를 음악적 도구처럼 이용하는 형태입니다.
작품을 넓히고, 확장하는 거죠.”
저는 영화 작업도 좋아하고, 텔레비전이나 연극도 좋아요.
인생의 대부분을 연기와 디자인에 쏟았죠.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융합적인 작업을 좋아합니다.
어려운 도전이지만, 그래서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공연은 제 목소리를 악기처럼, 언어를 음악적 도구처럼 이용하는 형태입니다.
작품을 넓히고, 확장하는 거죠.”
그러나 클래식 음악은 지루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뉴스에서도 클래식 음악 아이템은 잘 먹히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말코비치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나도 예전엔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모든 게 헬로키티처럼 쉬울 순 없어요.
대신 일단 익숙해지면, 클래식 음악은 엄청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뛰어들어보고 듣는 게 중요해요.
저는 힙합도, 재즈도, 아프리카, 아시아, 다양한 전통 음악도 모두 좋아합니다.
그 음악들이 전부 쉬운 건 아닙니다. 어려운 음악이 쉬워지는 방법은 여러 번 듣는 겁니다.”
대신 일단 익숙해지면, 클래식 음악은 엄청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뛰어들어보고 듣는 게 중요해요.
저는 힙합도, 재즈도, 아프리카, 아시아, 다양한 전통 음악도 모두 좋아합니다.
그 음악들이 전부 쉬운 건 아닙니다. 어려운 음악이 쉬워지는 방법은 여러 번 듣는 겁니다.”
그렇다. 세상에 쉬운 음악만 있는 건 아니다. 낯설기 때문이다. 한 번 들어서는 귀에 쏙 들어오지 않는 현대음악도, 자주 듣지 않는 거문고 산조도 어렵다, 아니 낯설다. 낯설고 어려워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더욱 자주 들어 낯익어지거나, 낯선 신선함 자체를 즐기거나. 말코비치의 말처럼 인생은 짧고, 새로운 건 언제나 재미있으므로.
▶ 공연장에서 만나는 말코비치…이색 연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