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지난 16일, 헌법재판소에 제출된 국회의 탄핵소추의결서와 관련해 A4용지 25장 분량의 답변서를 제출했다.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킨 국회의 탄핵소추의결서(관련기사 <한 장으로 보는 탄핵소추의결서>)와 같은 분량이다. 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자신의 법적 책임과 관련해 장문의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 답변서의 핵심은 “탄핵 소추 사유를 인정할 증거는 없고, 탄핵 절차에도 문제가 있다”로 요약할 수 있다.
박 대통령 측은 사실관계부터 절차까지 ‘전면 부인’했다. 국정농단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최순실 씨가 첫 공판준비기일(19일)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 한다”고 한 것과 같은 취지다. 두 사람이 탄핵 심판과 형사재판이라는 서로 다른 절차에서 하나같이 ‘모르쇠 전략’을 취한 이유는 간단하다. 한 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 쪽도 무너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법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운명공동체가 될 것을 선택한 셈이다.
이에 대해 탄핵 심판과 형사재판에서 범죄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을 취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법조계의 반응은 냉정했다. 법률적으로도 치밀한 전략이 아니었다는 의견이 상당했다.
●“무죄추정의 원칙”...“법 상식에 반하는 논리”
박 대통령의 답변서(관련기사 <"아니다","몰랐다","권한 밖이다"..한 장으로 보는 대통령 측 답변서>) 전문이 공개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도리어 커졌다는 평가가 있다. 이미 드러난 사실까지 전면 부인하고, “최순실 씨를 사적 자문단(이른바 키친 캐비넷)으로 규정하면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또 “100만 명 이상 국민이 촛불집회에 참석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는 헌법 규정은 없다”는 답변을 두곤 박 대통령이 ‘악수 중의 악수’를 뒀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조인의 기본적 상식에서 할 수 없는 허술한 논리”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지금 법원에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건 박 대통령이 아니라 최순실, 안종범 등 별개의 인물”이라며, “탄핵 절차와 최 씨의 형사재판은 별개이기 때문에 무죄추정의 원칙은 성립할 수 없는 기본적 상식”이라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이어 “현직 대통령은 형사 소추가 안 되기 때문에 대통령 직위를 상실해야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는 형사 재판이 진행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리인단의 논리는 모순”이라고 밝혔다. 즉, 헌재의 탄핵 결정이 선행된 뒤에야 형사 소추가 가능하고, 그 때서야 무죄추정의 원칙도 적용가능하다는 뜻이다.
●“법사위 조사 없는 탄핵 소추는 정당성 없어”...“국회법을 봐라”
박 대통령 측은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할 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자체 조사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문제가 있다는 입장도 내놨다. 국회법 130조 1항에 따라 “탄핵소추안의 객관성을 담보할 법사위 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라는 뜻이다.
●“연좌제 금지에 위배”...“본말 전도, 본인 잘못으로 탄핵 된 것”
박 대통령은 탄핵 반대 근거로 헌법에 13조의 연좌제 금지 조항을 근거로 삼기도 했다. 국정농단으로 기소된 최 씨와의 친분을 이유로 헌법상 책임을 묻는 건 도리어 헌법 위반이라는 주장이다.
장영수 교수도 “최순실 씨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 이런 논리를 펼칠 것으로 보이지만, 최 씨의 말을 듣고 각종 의사결정을 내린 건 대통령 자신이며 그런 결정 자체가 위헌적이라는 이유로 탄핵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대통령 또는 대리인단이 논리가 빈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런 답변서를 제출했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법률 위배가 전제 돼야 헌법 위배 성립”...“박 대통령의 자승자박”
박 대통령 측이 탄핵 심판을 기각해야 한다며 “법률 위배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헌법에 위반되느냐”고도 주장했다. “법률 위반이 인정된다고 무조건 헌법 위반이 되는 건 아니지만, 법률 위배가 없으면 헌법 위배도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헌법의 하위규범인 법률 위반이 성립돼야 헌법 위반 자체를 따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국회가 탄핵 소추 사유로 삼은 국무회의 무력화, 인사전횡 등 국정농단의 일부는 현행법으로 처벌이 어렵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헌법 전문가들은 “탄핵 심판 절차와 헌법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가능한 허술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임지봉 교수는 “탄핵은 대통령직 파면 여부를 결정하는 징계절차로 형벌을 정하는 형사재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근태가 나쁜 공무원에게 형사책임을 묻지 못하더라도 징계를 내릴 수 있듯 박 대통령의 주장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특히, 박 대통령 측은 답변서에서 ‘법률 위반이 아니더라도 헌법 위반이 된다’는 취지의 헌재 결정문을 인용하고 있어 ‘자승자박’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박 대통령 측은 “일시적인 여론조사가 국민 뜻을 대변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당시 결정문을 인용했다. “헌법상 국민투표로 대통령의 재신임을 묻지 못한다”는 헌재 결정문이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 신임에 대한 국민투표는 금지돼 있어, 전체 국민의 뜻을 알 방법은 없고, 이런 점에서 일시적 여론조사를 대통령 퇴진 근거로 삼아선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밝혔는데, 해당 발언은 공직선거법 위반은 아니었지만 탄핵 사유가 됐다. 당시 탄핵을 추진한 의원들은 국민투표 사유에 대통령 재신임은 포함돼 있지 않은데 노 전 대통령이 강행해 헌법을 위배했다며 탄핵안을 가결시켰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도 탄핵소추안 가결에 서명했다. 헌법재판소 역시 앞서 대리인단이 인용한 결정문에서 “재신임 투표 발언은 국민투표부의권을 위헌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대통령이 헌법적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결정 내린 바 있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는 “법률위반이 아니더라도 헌법위반이 된다는 사례가 담긴 결정문을 대리인단이 인용해놓고도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 것”이라고 이는 박 대통령 측의 자승자박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허술한 법 논리의 등장 이유 '탄핵 절차 지연‘
법조계에선 박 대통령 측 대리인이 무리한 법 논리를 근거 답변서를 제출한 근본적 이유로 ‘심리 절차 지연’을 꼽고 있다. 박 대통령 측 대리인은 답변서에서 “탄핵심판절차를 지연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각주에 적었지만, 주장의 요지와 전개 방식은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모든 사실 관계를 부인하고 절차적 흠결을 주장하면, 심판 과정에서 사실 조사를 위한 증인 신문, 증거 확보 등 별도의 절차를 진행해야 된다. 당연히 최종 결론이 내려지기 까진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의 노희범 변호사는 “박 대통령 대리인단은 심리 절차를 지연할 수 있는 부분은 모두 걸고 넘어졌지만 법 논리에 허술함이 많아서 설득력이 낮다”고 말했다. 장영수 고려대 교수도 “탄핵 절차는 형사재판과 달리 모든 의혹을 다 따질 필요 없이, 어떤 사유 하나가 탄핵을 할 만큼 중대한 사유로 인정된다면 탄핵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며 “대리인단의 ‘시간 끌기 전략’에 헌재가 응할 이유도 없다”고 지적했다.
형사재판의 경우 모든 혐의의 유무죄를 따져야 형량을 결정할 수 있지만, 탄핵 심판은 대통령의 파면 여부만 결정하면 된다. 10개의 사건 중 먼저 인정된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탄핵 사유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나머지 9개에 대한 판단 없이 ‘탄핵 결정’을 내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비판 받더라도 ‘특검만 피하자’
박 대통령의 무리한 시간끌기 전략의 궁극적인 목적은 ‘특검수사 피하기’라는 분석이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는 “특검 수사가 끝나기 전, 탄핵 결정이 내려지면 대통령의 지위를 상실한 채 특검 수사를 받게 되고, 이 경우 현직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 등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고 말했다. 직무정지 상태라도 현직 대통령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압수수색이나 체포영장 등 강제 수사를 회피할 수 있다. 수사 정보 취득 등 특검과의 힘겨루기에서 우위에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박 대통령 측의 답변서는 특검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하기 위해선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일단 탄핵 절차를 지연시켜 대통령 지위를 유지하는 게 유리하다고 전략에 나온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 지도자로서의 대통령은 사라졌고, ‘피의자 박근혜’만 남았다는 게 답변서를 통해 명백해졌다”고 말했다.
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한창진·장동호
디자인/개발: 임송이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 속에서 송곳 같은 팩트를 찾는 저널리즘을 지향합니다.